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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와 김화영 번역가 , 윤리 선생님과 나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나는 그대들을 이따 금식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 행운의 섬들 가운데


 하루키의 팬인 내가 하루키를 제치고 베스트로 꼽은 책은 단연 장 그르니에의 『섬』.  오늘은 장 그르니에의 『섬』을 펼치며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구절들을 다시 한번 차근히 읽어본다.


 고등학교 때 2년 동안 짝사랑한 윤리 선생님이 있었는데, 매주 월요일이면 학교 복도에 걸려 있는 자그마한 칠판에 좋은 글귀를 적는 것이 선생님의 일이었다. 장 그르니에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복도 칠판에 써 놓은 좋은 글귀 그리고 선생님을 짝사랑한 학생. 그 사이에 장 그르니에.

전형적인 여. 학. 생.이었다.


 난 처음에는 당연히 칠판 따위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나에게는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고 점심시간에 넓은 운동장에 나가 끝없이 어디론가 표류하는 구름을 보기에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나는 끝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었다. 『섬』에 적힌 장 그리니에의 글은 나에게 그런 흐름이었다.

 『섬』을 생각하면 그 겨울의 기운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돈다. 책을 안은 채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앉아 흘러가는 하늘을 보며, 텅 빈 교실에서 짝사랑하는 윤리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를 기다리며 , 그림을 그리다가도 문득 미술실 창가에 앉아 운동장 너머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학교 옥상에 올라가 한 겨울의 오후 햇살을 받으며, 나는 장 그르니에를 읽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마음이 두근두근 몰래 짝사랑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행복한 정경, 그리운 정경으로 남아있다.


 『섬』에는 실로 많은 철학이 담겨 있다. 고양의 몰루의 철학을 비롯해 바다에 떠있는 무수한 이름 없는 섬들 속에 장 그르니에는 꿈을 싣는다. 그의 꿈속에는 시간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고 도무지가 목적에 좌우되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에게 꿈은 타고난 병이었고 그는 달콤한 기분으로 그 병을 즐겼다. 하지만 그 병은 결코 꿈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장 그르니에의 글 속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기대가 들어있고 젊은 청년의 목적 없는 여행과 사랑이 담겨 있으며 삶에 찌들어 포기라는 것을 배운 중년의 공허와 노인의 지혜가 들어있다. 그리고 인생의 황금기에 끔찍한 사고로 눈에 피가 맺히고 다리는 절고 몸뚱이에는 총알이 박힌 채로 돌아온 고양이 몰루의 느긋한 최후가 이 모두를 감싸 안고 있다. 장 그르니에의 책을 펼치면 난 아직도 알베르 카뮈가 그랬듯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읽게 된다. 알베르 카뮈는 그르니에의 책을 펼쳐 드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며 말한다.





"나는 아무런 회한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든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카뮈
 



황혼 녘,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다해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 시키키 위해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뉘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나를 진정시켜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이렇게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을 열어 놓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일 때, 잠이 그대들을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한밤중에 그대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결산해 볼 때, 그대가 생각할 때--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장치 조차 없다.

-고양이 몰루 가운데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 씩이나 해 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난 늘 해왔다. 무슨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다만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정신과 시간 사이에는 견디기 어려운 간계가 맺어져 있다.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하늘의 투명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삭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냥 하나의 꽃에서 또 다른 꽃으로 달려갔을 뿐이다. --여행 그 자체 밖에는 아무런 목적 없는 여행들.

나의 목적은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다.

-공(空)의 유혹 가운데




<좌> 1988년  판본 <우>1993년 7월 판본
<좌> 2020년 판본  <우>1993년 8월 판본


 장 그르니에의 『섬』은 지금까지 민음사에서만 번역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1988년, 1993년 7월 8월, 2020년에 개정판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1993년 8월 판본으로 갖고 있다. 역시나 내가 샀던 책 표지가 가장 좋긴 하지만, 20년에 새로운 개정판으로 나온 표지도 세련됐고, 앞서 나왔던 초판본 2권도 섬의 내용과 딱 어울리는 책 표지다. 민음사에서만 나왔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지만, 감히 김화영 번역가의 번역보다 더 좋은 번역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때마침 20년도 개정판을 내면서 김화영 선생님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려, 기쁜 마음으로 일면식 없는 대선배 번역가의 번역 인생을 살짝 엿볼 수 있어 행복했다. 불어를 할 줄 알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의 직업을 생각해 볼 때, 불행히도 난 영어를 열심히 해도 부족할 판이다. 원어로 읽는 다면 느낌이 좀 다를까? 분명, 당장에 그의 발자취를 따라 구름이 표류하듯 그렇게 표류하고 싶어 질 것이다.


김화영 번역가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와 민음사 홈페이지에 기재된 『섬』의 리뷰를 올려본다.


http://naver.me/FbBhmmjZ


https://m.blog.naver.com/minumworld/222108466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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