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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Paldies(고마워), 마리카!




 설날 아침, 가족들에게 나누어줄 전을 부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게 부엌의 자그만 팬트리 문을 여닫으며 재료를 준비하고 있는데, 팬트리 창문을 통해서 달큰하면서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납니다. 설날에 빵이라니? 의아 한 마음도 잠깐, 아하~ 하며 살며시 눈웃음이 지어졌어요. 

 5인 집합 금지 명령으로 이번 2021년을 여는 설은 아마도 평소처럼 가족끼리 보내는 집이 많겠지요? 그동안에 명절만 되면 시댁이다 친정이다 오가며 이 음식 저 음식 부치고 지지고 찌고 나르고 씻느라 온몸이 각목처럼 굳어버렸을 우리 아줌마들, 어쩌면 이번 집합 금지 명령이 식후에 예상치 못하게 얻어먹게 된 달콤한 푸딩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너무 좋다 말할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많은 집들이 예년과는 다른 평화를 맞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우리 집 팬트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큰한 빵 냄새로 빵을 굽고 있을 주인공의 마음을 가늠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오늘, 그녀가 원했던 명절 아침의 그림을 굽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빵 굽는 냄새를 맡다 보니, 빵을 기가 막히게 굽는 또 다른 아줌마가 생각났어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 장갑 뜨기를 잘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사과 파이만큼은 엄마보다도 더 잘 굽는 마리카 아줌마. 마리카가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고, 나무에서 난 사과를 따서 맛있는 파이를 구웠던 나이가 삼십이니까 아줌마라고 할 수도 없겠네요. 하지만 어쨌든 마리카는 야니스와 결혼을 했고, 야니스를 위해 사과파이를 구우니, 아줌마는 아줌마입니다.  



 사과는 고아를 지켜주는 신목이기 때문에 집집이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습니다. 특히 사과는 맛있고 몸에도 좋아서 마리카와 야니스는 처음 집을 장만했을 때 마당에 사과나무 묘목을 여러 그루 심었습니다. 그 사과나무들이 자라서 해마다 탐스러운 사과를 선물합니다. 
 사과가 빨갛게 익으면 두 사람은 함께 사과를 땁니다.
야니스가 사다리에 올라가서 사과를 따면 마리카가 밑에서 받습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혹성처럼 빨간 사과가 알알이 빛나고 있습니다. 
 야니스는 문득 노트에 시를 쓰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얼른 눈앞의 사과부터 따야 합니다. 
 날마다 바구니 가득 사과를 땁니다. 그리고 곧바로 부엌으로 가져가서 조리합니다.
 사과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런 데다 향긋하고 맛까지 좋으니 재능이 많은 과일입니다. 
 마리카와 야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과 버터케이크입니다. 집에서 만든 버터에 집에서 채취한 꿀, 마당에서 딴 사과를 듬뿍 넣고 구움 케이크는 별미입니다. 마리카의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기로 유명한데, 사과 버터케이크만큼은 마리카가 만든 것이 더 맛있습니다.
 케이크가 구워지면 두 사람은 도토리 커피를 타서 함께 먹습니다. 새콤달콤한 사과 맛이 입 안 가득 번지면 세상을 다 가진듯한 충만한 기분이 듭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과 버터케이크를 먹는 행복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마리카는 마음속으로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힘든 시대를 견뎌내려고 했습니다.  

-'오이 피피 만드는 법' 가운데


『 마리카의 장갑 』사과 버터케이크


 세 집에 나눠줄 각종 전을 하나씩 찬찬히 준비해 가며 『 마리카의 장갑 』을 틈틈이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처음 마리카를 만났을 때는, '뭐야 이거. 어른한테 읽으라고 지은 이야기 치고는 너무 동화 같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읽으면서도 마음이 잘 가질 않았어요. 그래도 이왕 펼쳤으니 끝까지 읽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아! 이 작가, 문체가 정말 정갈하구나.  정갈하면서 절제돼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바닥 하나로 들어도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책 한 권 속에 마리카의 움직임과 생각과 성장하는 과정, 사랑, 단조로운 결혼 생활 속에서 일렁이는 생각들, 이별과 죽음, 나이듦과 떠남이 마치 하얀 광목천에 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서두리지 않고 그려졌습니다. 허투루 버려지는 실 한 올 없이 마리카의 인생이 하얀 광목천 위에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색색의 실로 마리카의 인생이 담겨있었고, 바늘이 지나갈 자리에는 무엇이 새겨질지 무척 궁금해지는 동시에 어느새 마리카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마리카, 너무 슬프지 않길....' 






『 마리카의 장갑 』의 배경은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라고 해요. 라트비아는 한 때 반세기에 걸쳐 러시아의 점령을 받았다고 하지요. 『 마리카의 장갑 』에는 러시아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루프마이제 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던 마리카의 성장기에서 시작해 점령 이후와 해방 이후 마리카의 삶을 그리고 있어요. 그러니 처음 책장을 펼쳤을 때 현실적이지 않고 동화 같다고 한 저의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려 먹고 말았습니다. 『 마리카의 장갑 』에 그려진 마리카의 삶이 동화처럼 보였던 이유는 너무나도 착실하고 정갈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말들로 그녀의 인생을 보여준 작가의 힘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라트비아라는 나라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그네들의 행복과 슬픔, 아픔과 극복의 과정을 이토록 본질이 드러나게끔 쓰지는 못했겠지요. 실제로 책 말미에 작가가 『 마리카의 장갑 』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방문했던 라트비아에 대한 이야기가 부록처럼 실려있습니다. 


 야니스가 왼쪽 엄지 장갑 속에 넣어 얼음제국에서 보내준 칠엽수 씨앗을 땅에 심고 돌아온 다음 날, 마리카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생각하지요. 


 마리카는 자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변화했을 뿐입니다. 
 야니스도 그렇습니다.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람과 빛과 비와 무지개와 흙과 나무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그날 이후 마리카는 음식을 넉넉히 만드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야니스가 귓가에서 속삭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카의 귀에는 이전보다 또렷이 야니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슬픔의 눈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 뿐입니다. 
 며칠 후 마리카는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엄지 장갑을 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엄지 장갑' 가운데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가족, 친척, 동네 이웃에게 나누어줄 엄지 장갑을 어려서부터 온 가족이 뜨는 일은 루프마이제 공화국의 전통입니다. 마리카도 그 전통에 따라서 엄지 장갑을 떠 왔어요. 하지만 마흔아홉이 된 마리카는 야니스의 칠엽수 씨앗을 땅에 놓아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장갑을 뜨기로 합니다. 그 모습이 참 우리네 엄마들, 아줌마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전을 부치다 말고 울컥 마음이 걸려버렸습니다. '나는 아직 마흔아홉이 아니니, 기쁜 마음으로 전을 부쳐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어야지. 애당초 누가 시켜 한 일도 아니니, 나는 마리카처럼 행복한 사람이야.' 괜스레 마리카의 삶에 저의 인생을 빗대어 봅니다. 그러다가 또 생각하지요. '아, 그래도 나는 마리카처럼 담담하게 나의 슬픔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지?' 마리카가 이겨낸 삶에 대한 슬픔이 결코 담담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변함없이 장갑을 뜨고, 케이크를 굽고 잼을 만들고 불을 지피고 나무를 심고 고아들을 가르치는 마리카가 대단해 보입니다. 전을 부치면서, 아흔이 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날로 쇠약해지는 동시에 괴팍해지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언니와 남편을 생각하면서, 삶의 고단함을 짊어지고 가게 될 아이를 생각하며, 주책바가지 전을 부칩니다. 


『 마리카의 장갑 』은, 

바로 그런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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