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너무 커서 아름다움으로 피어난 목련 이야기
어떤 꽃, 좋아하세요?
저는 봄이 오면 목련과 라일락이 언제 피려나, 아파트 화단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목련 나무와 라일락 나무를 지나갈 때마다 쳐다본답니다. 어린 시절 살았던 아파트 단지 안에는 목련과 라일락이 많아서 봄만 되면 단지 내 사방 천지가 커다랗고 하얀 꽃과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깊고 매력적인 향을 풍기는 보랏빛 꽃으로 뒤덮였는데 말이에요. 안타깝게도 지금 사는 곳에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목련 나무 몇 그루와 라일락 나무 두 그루뿐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귀해서 봄이 올 때마다 꽃이 피고 향을 풍기기를 마음으로 은근하게 기다리게 되네요.
어린 시절 뇌리에 박힌 풍경 때문인지, 저는 목련과 라일락을 가장 좋아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좋아하는 꽃은 많지만, 역시 꽃을 생각하라고 하면 목련과 라일락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특히 순백의 아름다움을 두 손바닥 가득 넘칠 만큼 크게 피워내는 목련은 아무리 해도 좋은 꽃이 돼버렸습니다. 목련이 활짝 핀 나무 아래 앉아보셨나요? 나무 주변이 결계에 둘러싸인 듯 전혀 다른 세상 속에 앉아있는 느낌이에요. 목련 나무가 나를 감싼 채 투명한 결계 너머 세상을 보여주는 기분이 들지요.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하얀 목련 꽃에 둘러싸여 바라보는 세상은 역시 내가 앉은 이곳이랑은 전혀 다른 색과 소리와 모습을 가졌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모두가 일터로, 삶의 터전으로 향한 한낮의 봄날에 목련나무 아래 앉아보세요. 혹은 라일락 향이 한층 더 짙어지는 한밤의 봄날에요. 그런 봄날에 올려다본 목련 나무 이야기를 초여름의 길목에 들어선 지금에야 조금씩 풀어봅니다.
목련(木蓮)에는 나무에 핀 연꽃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동그랗게 오므린 큰 꽃봉오리가 마치 연꽃같이 피어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요. 목련이 어떤 의미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의미를 되짚어보니 정말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련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있어요. 꽃을 피우는 모양새가 고혹적이고 우아하면서 동시에 신비롭고 순수해서 그런지 나라마다 목련에 붙인 다양한 이름이 있어요.
중국에서는 백목련을 목란(木蘭)이라고 부르는데, 백목련의 향이 난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에요. 사실 목련은 향이 거의 나지 않아요. 목련의 향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목련차를 마시면 알 수 있답니다. 차를 우리기 전에 손바닥 한가득 말린 목련꽃을 올려 코로 맡으면 목련 향이 이런 건가 하고 알 수 있지요. 아니면 목련이 막 꽃봉오리를 피웠을 때 나무 아래 앉아 보세요. 은은하게 퍼지는 목련 향을 느낄 수가 있답니다. 목련은 꽃의 색과 모양에 따라서 백목련, 자목련, 별목련 등 다양하게 불리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꽃눈이 붓을 닮았다고 해서 목필(木筆)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또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한다고 해서 북향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요. 반면 우리나라의 목련은 함박꽃이라고 불리는 산목련이에요. 봄이 되면 줄기와 잎이 먼저 난 다음에, 꽃을 피우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백목련이나 자목련과는 다르답니다. 깊은 산 계곡이나 정상에서 나는 함박꽃은 야생 목련, 천녀화, 천녀목란, 옥란, 함박꽃나무 등으로도 불려요. 중국에 백목련, 우리나라에 함박꽃이 있다면, 일본에는 호오노키(ほおのき)라는 이름을 지닌 일본목련이 있어요. 일본목련은 중국과 한국의 목련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인데, 과연 그 나라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제각각 풍기고 있어 신기할 따름이에요. 세 나라의 목련을 한번 비교해 볼까요?
저는 생김새가 조금씩 다른 세 나라의 목련을 보고 전통의상을 입은 각 나라의 미인도가 생각났어요.
왼쪽은 한국의 <미인도>로 19세기에 그려진 그림이에요. 현재는 해남 윤 씨 종가의 소장품으로 있는데, 우리나라 산목련인 함박꽃이 이 미인도의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결과 소박하면서 순수한 느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운데 사진은 중국 <채화미인도>의 일부분으로 1899년 관념자가 그린 그림이에요. 중국 특유의 화려함이 그림에도 묻어나는데, 순백의 얄상한 중국 백목련이 채화미인도에 담긴 미인의 화려하고 늘씬한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맨 오른쪽 사진은 일본 <기둥시계 미인도>로 18세기에도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에요. 어떤가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본목련의 느낌이 그대로 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목련도 미인도 중국과는 다른 화려함과 칼로 벤 듯 분명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을 지녔습니다.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목련을 볼 때마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순수하고 고상한 여인이 생각나 세 나라의 미인들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일본목련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어요. 그 시절 들어온 일본목련을 호오노키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후박(厚朴)이라고 써요. 그래서 아직까지 일부 사람들은 목련 나무를 후박 나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목련과 후박은 엄연히 다른 나무예요. 목련 나무와 후박나무는 생물 분류상 목련목에 속하기는 하지만 하위분류인 과와 속으로 세분화하면 목련은 목련과, 목련 속, 후박나무는 녹나무과 후박나무 속에 속해요. 후박나무의 생김새를 살펴볼까요?
나무에 꽃이 달리는 모양이나 열매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생김새가 다른 후박나무인데 왜 목련 나무를 후박 나무라고 했을까요? 그건 일본목련 호오노키가 한자로 후박이라고 쓰여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련의 두꺼운 나무껍질이 후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기도 해요. 목련의 나무껍질은 예로부터 중풍이나 학질, 냉기에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는 증상을 풀어줄 때 다른 한약재와 섞어서 쓰거나 복부팽만, 위장질환을 치료할 때 다려서 마셨다고 해요. 그런데 값이 너무 비싸서, 우리나라 자생 식물 중에 목련의 나무껍질만큼 두꺼운 후박나무를 썼다고 하지요. 후박나무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에서 목련보다 흔하게 있는 나무예요. 위장병과 치주질환, 천식 증상을 완화시켜주고, 가래를 삭이는 등 다양한 효능을 갖고 있지요. 약재로 유용하게 쓰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목련 나무와 후박나무가 전혀 다르다는 것, 이제 잘 아셨지요!
앞서 목련의 꽃봉오리가 북쪽을 바라보고 피어서 북향화라고 불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목련이 북향화로 불리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목련과 관계된 슬픈 이야기지요.
아주 먼 옛날 하늘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어요. 공주는 백옥같이 흰 얼굴에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고와서 모든 청년들이 공주를 아내로 삼고 싶어 했지요. 하지만 공주는 청년들의 구혼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어요. 공주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이를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공주가 사랑한 이는 북쪽 바다를 다스리는 해신이었어요. 북쪽 나라 해신은 흉악하고 무섭기로 소문 나 있었지만 북쪽 해신과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는 공주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지요. 한마디로 해신의 모습만 보고 짝사랑에 빠졌던 거예요.
공주의 마음을 알게 된 하늘나라 임금님은, 철부지 공주가 영 못마땅하기만 했어요. 그러니 어땠을까요? 공주가 궁궐 밖을 나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단속을 했겠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공주도 아니었어요. 가만히 있었다면 목련 설화도 없었을 테니까요. ^^
공주는 결국 북쪽 해신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갔답니다. 북쪽 바다로 향하는 공주의 마음은 넘실대는 파도처럼 기뻤지만 그런 마음도 잠깐, 공주는 곧 어마어마한 진실을 맞닥드리게 되지요. 바로 북쪽 해신에게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어요.
뜻밖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공주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어요. 하늘나라의 공주나 돼 갖고 바다의 신을 사모하게 된 것도 모자라 몰래 야반도주까지 했으니 임금님을 볼 면목이 없었던 거지요.
한편 하늘나라 공주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쪽 해신은 흉악한 바다의 신이기는 하지만 공주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해신은 바다에 가라앉은 공주의 주검을 찾아내 예를 갖춰 땅에 묻어주었지요.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 해신,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답니다.
공주의 죽음이 영 안타깝고 애절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 포악하고 삐뚤어진 성격 때문일까요? 공주만 고이 묻어주면 될 일이지, 아무 죄 없는 자기 부인에게 독약을 먹이고는 공양의 의미로 공주 옆에 묻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부인이 무슨 죄냐고요!
어쨌든, 그렇게 해신의 부인까지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늘나라 임금은 이 불쌍한 두 여인의 무덤에 꽃이 피어나게 했답니다.
공주의 무덤에 핀 하얀 꽃이 백목련,
부인의 무덤에 핀 자주색 꽃이 자목련이 된 것이지요.
이 두 목련은 여전히 해신이 머물고 있는 북쪽을 향해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답니다.
백목련은 해신을 여전히 사모해서 그렇다 쳐도,
자목련은 어떤 마음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목련이 전하는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목련과 관계된 문학작품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뮬란」이 있어요. 「뮬란」은 중국 발음 '무란'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중역이 되어 쓰이게 된 표현인데, 중국의 전한(前漢) 시대 때 민간 가요의 수집을 위해 악부라는 음악 관서에서 모은 가요 중에 「목란사(木蘭辭)」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에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 백목련이지요. 다음은 「목란사(木蘭辭)」의 일부분이에요. 표현이 고풍스럽고 재미있어 관련 내용을 실어봅니다.
많은 군첩 속에 아버지 이름도 끼여 있소.
우리 집엔 장남 없고 목란에겐 오라버니 없으니
내가 안장과 말을 사, 아버지 대신 싸움터에 나가겠소.
동쪽 장에서 말을 사고, 서쪽 장에서 안장 맞추고
남쪽 장에서 고삐 사고, 북쪽 장에서 채찍을 사
아침에 부모에게 하직하고, 저녁에 황허에 머무르다
부모 애타는 소리 못 듣고, 다만 황허 물소리만 철철
어침에 황허를 떠나, 저물어 흑산두에 묵다
부모 애타는 소리 못 듣고, 연산(燕山) 오랑캐 말굽 소리 터벅터벅
만 리나 변경 싸움터에 나서, 날 듯 관문과 산을 넘었다
삭북의 찬바람은 쇠종소리 울리고, 찬 달빛은 철갑옷 비춘다
장군은 백전을 싸우다 죽고, 장사 10년 만에 돌아오다
돌아와 천자를 뵈오니, 천자는 명당에 앉아
공훈을 열두 급으로 기록하고, 백천 포대기의 상을 내린다
가한은 소망이 뭐냐고 묻거늘, 목란이 대답하되 상서랑의 벼슬도 싫소
원컨대 명타천리마(明駝千里馬)를 빌려 주어 나를 고향으로 보내 주오
부모는 여식 돌아온다 하니, 곽(郭) 밖으로 나와 환영한다
언니도 동생 온다 하니, 새 옷 바꿔 입고
남동생은 누이 온다 하니, 칼 갈아 돗과 양을 잡는다
동각(東閣) 내 방문 열고, 서각상(西閣牀)에 내 앉으며
싸움 옷 벗어 놓고, 옛 차림하며
창 앞에서 머리 빗고, 거울 보고 화장한다
다시 나가 전우를 보니, 전우들 눈 먼듯 놀라며
12년을 같이 다녔건만, 목란이 여자인 줄 몰랐도다
수토끼 뜀걸음 늦을 때 있고, 암토끼 분명치 못할 때 있거늘
두 마리 같이 뛰며 달리니, 그 누가 가려낼 수 있겠는가.
「목란사(木蘭辭)」 중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백목련으로 불린 뮬란의 모습은 중국의 화보집인 화려추췌수(畫麗珠萃秀)에 실려있어요. 화려추췌수는 아름다움을 담은 보석상자라는 뜻인데, 여러 시대 미인들의 모습을 그린 화보집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뮬란이 과연 백목련이라고 불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지요?
목련은 우리나라의 시나 설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조선시대 중기 구사맹의 한시에는 “꽃은 오히려 북쪽을 향해 모두 머리를 돌리고 있다.”는 표현이 있어요. 자신은 남쪽에 있으나 임금이 계신 북쪽에 가지 못하는 충정의 마음을 목련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지요. 또 북쪽은 추운 방향이라 목련이 북쪽을 향하는 것을 문학에서는 ‘시련과 눈물 속에서도 사랑을 지키는 의미’로 활용한 경우가 많아요. 앞서 소개한 백목련과 자목련의 설화와도 맥락이 같은데, 현대 시인 김학산의 <북향화>라는 시에서는 “그래도 임 향한 마음 하나는 항상 북쪽”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목련의 꽃말은 숭고한 정신이에요. 전해지는 설화처럼 백목련은 사모와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이 꽃말이고 자목련은 가족 간의 우애와 숭고한 사랑을 꽃말에 담고 있지요.
해마다 봄이 오면 귀족적이면서도 순수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백목련이 피기를 기다렸는데, 사모하는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해 슬픈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공주의 마음도 숭고하지만 지아비를 섬겼다는 이유로 이유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해신의 아내 역시 그 희생이 아름다울 만큼 슬프고 고귀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목련을 볼 때마다 작금의 생기와 젊음을 주체하지 못해 한꺼번에 피었다가 자지러진 웃음을 터뜨리며 후드득 떨어지는 벚꽃과는 다른 고아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 안에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목련은 다른 봄꽃들과는 다르게 꽃이 질 때 그렇게 한 겹 두 겹 꽃잎을 떨어뜨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슬픔이 너무 아름다워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나고, 그 아름다움이 슬프도록 버거워 자기 몸을 하나둘씩 떨구어 내는 것인지도요.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밤에, 목련 나무 아래 앉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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