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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고 싶은 흐름 그럼에도 붙잡고 싶은 단상들

22년의 초입에 21년을 되돌아보다


 답지 않게 아침 6시부터 눈이 떠졌다. 9시가 넘도록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주일에 하루뿐인 주말 찬스인데 방안의 명암이 아직 어슴푸레한 시각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안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곤히 자고 있는 우렁이를 깨워 당수치를 재볼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한다. 하루에도 여덟 번이 넘도록 발바닥이며 귀를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는 아이다. 오늘만큼은 아침 사료를 먹을 때까지만이라도 곤히 자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작년 11월을 기점으로 나의 아침 루틴에는 아이의 등교 준비 외에 우렁이의 당수치를 재고 인슐린 주사를 놓고 수액과 안약, 간 약을 투여하는 일이 더 늘었다. 2년 전 산책길에 먹은 유박비료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 기능 80% 이상 손상이라는 상흔을 남긴 채 살아남았다. 그 후로 1년 동안 나는 우렁이의 간 기능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기 위한 긴 싸움을 벌였고 우렁이도 잘 버텨내 주는 듯했다. 그것이 작년 11월까지 였다. 우렁이는 이제 급성 당뇨로 인한 실명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고 몸안의 당수치는 놀란 야생마처럼 날뛰고 있다. 3주간의 병원 입원에도 당수치가 잡히지 않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위험부담을 안고 우렁이를 퇴원시켰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병원비를 부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과 사가 돈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난 12월부터 지금까지 매일 하루에도 열댓 번씩 우렁이의 당수치를 재고 있다. 어제와는 또 다른 우렁이의 당곡선을 분석하고 내 나름으로 판단해서 인슐린 주사를 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묻고 있다. 아이의 등교를 준비하고 우렁이의 당수치를 관리하고 나머지 두 반려견의 아침과 산책을 챙기고 나면 어느새 남편과 내가 먹을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



 평소보다 싸늘한 방안 공기에 혹시나 하고 창문을 열어 보았더니 눈앞의 세상이 온통 하얗다. 새벽에 내린 눈은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많이 내리지도 않고 새하얀 싸락 이불 한 장 만을 땅 위에 덮고 사라졌다. 차라리 두꺼운 공단 이불 덮어줬으면 잠시라도 따뜻할 텐데 아쉽네 생각하면서도 예쁜 풍경에 잠시 숨을 멈춘다. 더 잘까 아니면 전날 오랜만에 찾아갔던 서점에서 산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사이 아침 찬 기운에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 미련 없이 창문을 닫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한 해의 마무리를 꼭 다음 해가 시작되고 나서야 하게 되는 것 같다. 신입 사원 환영식에 퇴사하는 동료의 송별회를 얹는 꼴이다. 송별회 때 남들 다 하는 이별 인사를 끝까지 버티고 안 했다가 다 지나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에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밀물이 들어왔는데 빠져나가야 할 썰물을 막아놓고 가둬놓는 꼴이니 그때의 마음속 생태계가 어떨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그려지리라 생각된다. 아쉬웠던 기억들과 붙잡고 싶은 순간들, 회한 어린 시간들이 내일의 흐름과 뒤엉켜 머릿속이 혼탁해진다. 그래서일까,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레 발길이 서점으로 향한다. 매 순간순간 책과 관계된 것이라면 이제 그만두고 싶어 하다가도 연초만 되면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서점엘 가고 싶어 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마음이 제자리를 찾고 뒤죽박죽이 되었던 시간의 흐름이 자기 결을 찾는다.



 2022년의 첫 서점 나들이에서도 나는 어느새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사고 싶은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난감해하는 나 자신을 보며 불과 얼마 전까지'내가 두 번 다시 글 쓰는데 하루 종일 끙끙대나 봐라!' 했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혼란에 빠졌다. 결국 나는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 행복해졌고, 서점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며 새로 나온 신간과 스테디샐러, 매니악 북과 전문서적의 부드러운 홍수 속에서 유영하며 내 살결에 닿는 서점의 공기를 마음껏 만끽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뒷좌석에는 다섯 권의 책이 조용히 정복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싸늘한 아침 기운에 잠은 달아난 지 이미 오래고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백지 같은 하루를 온전히 홀로 누리고 싶어 조용조용 내 방 책상 위에 어질러진 지난 일 년의 흔적을 치우고 그 옆에 놓인 간이 책장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다 읽은 책은 서재 책장에 도로 꽂아놓고 읽어야 할 책과 리뷰를 쓰고 싶은 책은 얇게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간이 책장에 쌓아둔다. 전날 샀던 책은 가장 잘 보이는 위칸에. 책상 위에 영수증들과 각종 청구서들도 가계부 정리가 끝나면 가지런히 모아서 클립으로 집어 놓아야 하겠지. 우렁이의 당수치 표는 새로 뽑아서 기록 차트에 미리 꼽아 놓고 구급 박스에 채워야 할 주사기와 채혈 시험지는 주문해야 한다. 아이가 합격한 고등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성적 일람표에는 학부모 도장을 찍어야 한다. 청구서와 영수증은 올해에도 다시 쌓일 테고, 읽고 싶은 책과 다 읽은 책과 손봐야 할 책 역시 또다시 내 책장 위에 아무렇게나 쌓여가겠지만 올해도 내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지금 같이 이 서느런 시간에 지나간 흔적들을 매만지고 있겠지 싶다. 내가 어쩌지도 못한 채 맞아야 하는, 외면하고 싶은 흐름들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더듬어 매만지며 그렇게 그렇게 또 이미 도래한 새로운 해 속에서 지나간 해에게 작별을 고하겠지 싶다. 음... 마치 기프트의 <내일의 나에게> 속 노랫가사 처럼 말이다.


 


https://youtu.be/zuuIRVxkzoQ




내 글을 보는 이야 많지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딱히 친하다고 할 수는 없어 고맙다는 말이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고마운 분들에게, 그리고 친해서 고맙다는 말을 또 한 번 더 해주고 싶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드문드문 올림에도 부족한 나의 글을 읽기 위해 들러주시는 브런지 작가님들

우렁이를 위해 애써주신 24시 윌동물병원의 채원장님과 간호사님들,

추운 날씨에도 언제나 아파트 화단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꿔주시는 아파트 관리실 선생님,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인문학적으로 나의 의식을 일깨워준 여러 인생 선배님들과

아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예쁜 말로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이승행 선생님,

나의 단짝 정연이

그리고 그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나의 가족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좋은 말들로 당신의 새로운 해가 채워지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아 참! 그리고  예쁜 작가 카드를 발행해준 브런치에게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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