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의 여자 아이를 만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아이는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눈에 띄는 데가 있는 것도, 멋진 옷을 입은 것도 아니다. 나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 100%의 여자 아이다. 그런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
내 마음에 딱! 들어맞는 것들은 그런 성질을 갖고 있다. "결코 유형화할 수 없는 성질"이라고 하루키는 말한다.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이야기 하기에 100%의 것들은 시시각각 모양을 바꾼다.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벽해 보이기도 하고 그저 그래 보이기도 한다. 매 순간 다른 색깔과 향기, 해석을 내놓는다.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다만 대충 어떻다 정도로만 얘기할 수 있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아이의 눈이 코가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미인의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을 정도. 하지만 나에겐 100%, 그립고 슬픈 존재.
햇살 눈부신 4월의 한낮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자기 것인 양 흐드러지게 폈던 벚꽃은 이제 모두 떨어지고 연둣빛 이파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떨어지지 않고 남은 몇 송이 만이 변덕스러운 봄바람에 매몰차게 흩날릴 걸 두려워하며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운전을 하며 가는데 차창 밖으로 옷차림이 가벼워진 사람들이 보인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 보는 사람들은 서른 일 때와 스물일 적에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느껴진다. 찬란했던 시절 보았던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모두 찬란해 보였다. 그들이 누구일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지금은 흥흥, 그저 그런 인생살이, 흥흥 거기서 거기. 가끔은 아아, 지겹네 지겨워. 흥흥. 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화들짝 놀란다. 그들을 보는 나의 이런 시선이 사실은 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꾀죄죄한 머리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어도, 대한민국 표준 일상복이라는 등산복을 입고 얼굴에 중년이라는 그저 그런 인생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왔데도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다. 찬란했던 시절 보았던 찬란한 사람들은 실은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다.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마흔이라는 사막에서 바라보는 그저 그런 사람들은 호기심에라도 그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았다가는 내 인생에 큰 파문이 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위대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 앞에서 나는 단지 어린 시절 큰 대륙 몇 개를 건너와 여차저차 한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하고 우왕좌왕 20대를 보내다 전전긍긍 일하며 한 가정을 꾸린 아줌마에 불과하다. 살다 보니 무언가에 휩쓸려 철학도 신념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보통의, 때로는 보통보다 못한 아줌마. 그런 주제에 자기 멋에 사는 구제불능.
카페에 앉아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며 위대한 주인아줌마가 얼룩 하나 없이 깨끗이 닦아놓은 투명한 유리창 너머를 바라본다. 4월이 찬란하고도 처연하게 펼쳐져 있다.
아, 그립구나. 말이 입술 끝에서 나지막이 맴돈다.
모든 것이 싱그러웠던 젊은 시절의 내가 그리운 것인지 그 시절에 만났던 100%의 아이가 그리운 것인지 앞으로는 절대만나게 될 일이 없는 것들이 그리운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모두겠지. 비가 촉촉이 내린 뒤 눈부신 햇살에 온 세상이 싱그럽게 반짝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 느꼈던 감정들은 기쁨, 슬픔, 아픔, 치유, 상실까지도 모두 싱그러웠다.
유리창 너머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길을 건너 아파트 단지 안으로 사라진다.
아침에 남편이 내려준 커피가 생각난다. 그가 내려주는 커피는 언제나 맛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작년에는 그가 중세 필사본 해설서를 사다 주었다. 만만치 않은 가격에 중고 책방에 책이 나오면 사려고 했던 것인데 그가 월차를 낸 평일 아침에 나를 위해 꽉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강남의 서점에 가서 사 주었다. 나를 놀라게 하기 위해 몰래 말도 없이 벌인 일에 웃음이 났지만 그가 책을 사 준 것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그것만은 온전히 내가 나를 위해 사고 싶었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것들이 생긴다. 남편에게 받지 않는 게 더 좋은 것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책장 한 귀퉁이에서 "난 남편이 사준 책이라고!" 으쓰대는 것 같다. 중세를 건너 오늘에까지 온 책이니 그럴만하다. 몇 년 전엔가는 남편이 또 몰래 내가 좋아하는 터키석 귀걸이를 사 왔다. 그것 역시 중세 필사본 해설서와 같은 경우였다. 선물을 받아 든 손은 미지근했지만, 나를 놀라게 했다는 성취감에 짓는 그의 웃음은 정말 멋졌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웃음이다.
남편은 내게 100%의 남자아이가 아니다. 하루키의 100%의 아이처럼 함께 있다고 해서 고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실컷 얘기만 나눌 수 있는 그런 상태는 더더욱 아니다. 얘기를 나누다가도 나는 그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러 가야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보내야만 할 시간이 있다. 얘기를 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 얼굴을 붉힐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며칠을 간다. 화해는 뒤끝을 남기고 마음에는 앙금이 남는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남편에게 100%의 여자 아이는 아닐 터이다. 하지만 지금은 남편의 경우만 얘기하자. 내 경우는 남편이 얘기해야 할 몫이니. 애초에 나와 남편이 처음 만났을 때도 서로가 서로에게 100%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85% 언저리 그 어디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들의 100% 완벽한 만남에 의문을 품은 아이들이 서로 헤어진 뒤에도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시험하는 동안, 그러다가 시간의 농락과 삶이 가져다준 망각으로 기억의 빛이 희미해지는 동안 -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 - 네, 정말 그렇습니다 - , 85% 언저리 그 어디쯤에 있던 나와 남편은 내내 함께였다. 15%의 고독과 앙금은 끊임없이 자기 영역을 넓혔고 여전히 넓히려고 애쓰고 있지만 가끔 그가 보여주는 멋진 웃음과 장난기 가득한 표정, 다정한 모습과 그가 내려주는 커피에 저 멀리 후퇴한다. 나는 맛있는 요리를 해준데 대한 답례로 설거지를 해주는 남편에게 앞치마를 매 주고 짓궂은 미소를 띤 채 그의 배를 두드린다. 주말이라고 수염을 깍지 않은 까끌까끌한 볼에 가볍게 뽀뽀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그저 그런 사람들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15%의 고독과 85%의 소소한 행복을 여차저차 지금에까지 끌고 오면서 시간의 농락과 삶의 망각 속에 상대방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댔을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85%라는 것을 알기에 - 65% 일수도 있고 35% 일 수도 있다. 그런 건 살다 보면 알게 된다 - 그 사이에 그 어떤 시험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100%의 아이들이 할 법한 그런 시험은 너무 위험하다. 누군가는 이미 경험으로 터득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관계가 고독과 앙금 속에 언제든 잠식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지긋지긋하리만치 지지고 볶고 산다. 그래서 서로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따위의 대답은 없다. 남편의 입술은 얇고 콧날이 휘었고 눈썹 끝이 용눈썹처럼 치켜 올라갔다는 것쯤은 눈을 감고도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 얼굴 선만 만져도 몸매만 더듬어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길 한복판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갈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설사 수많은 인파 속에 서로를 놓친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고야 만다.
"어디 갔었어? 찾았잖아!"
서로에게 85%인 두 사람은 시간의 농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선지 시간은 때로 불가항력의 폭력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는 것 같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결말 대신 "쓸쓸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가 된다.
햇살 찬란한 4월의 한낮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100% 남자 아이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85% 남편의 웃음은 정확하게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