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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1번 님께

- 당신이 알지 못하는 2022년의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는데도 커피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가시지 않고 평소에는 혼자 내 돈 주고 사 먹기 아까워했던 써브웨이 BLT 샌드위치를 '오늘 하루는 나를 위해!'라고 생각하며 사 먹지만 그마저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창밖으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아침 햇살과 너무나도 파래서 도무지 얼마나 높을지 알 수 없는 하늘을 보며 아, 하고 외마디 감탄을 하지만 몸은 꾸물꾸물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파 구석으로 파고들어갑니다. 그 느낌이 무척이나 어둡고 무겁고 불길합니다.


언제 왔는지 모를 기분 나쁜 잠이 눈꺼풀을 삼켜버립니다.  나의 밖으로는 찬란한 하루가 빛나지만 나는 어둠도 아닌 뿌연 회색이 됩니다.


잠과 빛의 경계에서 회색의 의식이 연기처럼 피어오릅니다.


'겨울이 오고 있어.'


'네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쓰는 감성이 더 이상 안에 없기 때문이야.'


'어디로 간 걸까?'


'그럴 수밖에... 하루 종일 누군가의 마음을 챙기다 보면, 누군가의 현실을 치다꺼리해주다 보면 내 마음 따위는 묻혀버리니까. 층층이 층층이 깊숙이 묻혀서 어떤 모양이었는지도 모르게 부식 되어버리는데, 글 쓰는 감성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없게 돼버리니까.'


얼마 전에 알 수 없는 번호로 이상한 문자가 왔습니다.


"잘 지내니? 갑자기 생각이 났어. 별일 없니?"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문자를 보내온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으니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한 34초간 궁금해집니다. 그러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랍게도 궁금증이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누군들, 그 이는 지금의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


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그 이는, 별 일이 없는지 궁금해하는 그 이는 아마도 예전의 나를 떠올릴 만큼 그때의 감성이 그대로 있나 봅니다. 아니면 잠시 잠깐이나마 그때의 감성이 표면 위로 떠올랐던가 봅니다.


'난 더 이상 그 이를 예전의 감성으로 마주하고 인사할 수 없어. 난 변형됐으니까. 예전의 내가 아닌 내가, 예전의 나를 떠올리며 문자를 보낸 그 이를 마주 보고 인사한다면 그 얼마나 기괴한 광경이 될까.'


문자를 보내온 그 이는 내 의식의 아주 깊숙한 곳에 그대로 묻혀버립니다.


현실이 얘기합니다.


"그거, 스미싱일 수도 있어. 연말 이맘때쯤 되면 기승을 부린다잖아. 궁금해서 번호를 누르는 순간! 핸드폰 요금 폭탄 맞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아, 그런 거구나.'


34초의 시간마저 잠식되어 버립니다.


우울증이 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되돌려 생각해보니, 나는 꽤 오랜 시간 우울 속에서 살고 었었습니다. 그것도 현실이 알려주었습니다. 우울이라는 녀석이 찾아올 때면 나타나는 증상들을. 그런데 나는 꽤 오래, 그 증상들이 바로 나 자신인 줄 알고 안고 살았습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우울이라는 녀석을 보듬어주거나 말동무를 해 달래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녀석과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거나, 그 녀석을 이기려고 애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침잠 아니면 저항. 그것이 나를 이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오래 그 녀석이 나인 줄 알고 살아서, 이제 와서 그 녀석을 달래주거나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안고 살면 안 되나,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았으니, 그래도 되지 않나.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우울에 잠식돼버리는 현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이 잠식되지 않게 하려면, 현실의 마음들도 돌보고 내 마음과도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과 얘기하려면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는데, 도무지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도무지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야말로 진짜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뫼비우스의 띠가 돼버립니다. 소중한 현실인 동시에 가차 없이 잔혹한 현실입니다.


'이제 일어나야 해. 집안을 정리하고, 따뜻한 식탁을 차려야 해.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잖아.'


우울인지 나인지 모를 누군가에게 기분 나쁘게 스며들어온 잠이 이야기합니다.


'아니야. 나는 지금 우울한 거니까, 얘랑 얘기부터 나눠야 해.'


'뭐래... 답지 않게. 일어나 그만.'


'.... 그럴까....?'


찬란한 햇살이 서쪽 하늘로 기울어질 즈음 나인지 우울인지 모를 나는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단단해집니다.


'그만 일어나야겠네.'


나를 갑자기 떠올리고 별일 없는지 궁금해 한 그 이에게, 그가 나를 생각한 시간만큼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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