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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Nov 11. 2021

응원이 필요한 도전기



나는 2킬로 남짓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지금이야 한두 달 미숙아들은 어렵지 않게 건강한 아이로 자랄 수 있지만 내가 태어난 70년대에는 인큐베이터 자체가 흔하지 않아 부모님이 꽤나 전전긍긍하셨던 모양이다.

소아천식이 심해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엔 간호사들이 피 뽑을 때 쓰던 노란 고무줄이 긴 병원생활 동안 내 유일한 장난감이었다고 하니 아픈 걸로 명함을 내밀면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 밥상은 기관지, 폐에 좋다는 각종 뿌리 식물과 쓰디쓴 나물이 주를 이뤘고 단백질은 두부와 생선이 먼저, 어쩌다 영접하는 고기는 늘 기름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퍼석한 살코기였다. 뭐, 반은 채식주의자로 키워졌다 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이렇게 밥상 위에선 누구보다 채소와 친하게 지낸 나도 희한하게 채식주의자라는 말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채식주의자라... 마치 염세주의자, 기회주의자, 차별주의자란 단어처럼 비관적 시선을 내포하고 있거나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같이 정치적, 사회적 뜻을 함포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어느 날  ‘육식은 폭력’이라는 피켓을 든 채식주의자들의 뉴스라도 보는 날엔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어야 할 식생활에 폭력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그들의 구호가 되레 강압적이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랬던 내가 채식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었다.

채식주의자들을 보면 누구는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는 동물보호를 위해, 누구는 지구의 환경문제에 위기의식을 느껴서 등 거창한 목표가 앞에 있던데 나의 채식은 부끄럽지만 징그럽고 무서운 것을 회피하고자 시작됐다.

응원이 필요한 도전기를 쓰기에 앞서 지금부터는 엉망진창이었던 내 십수 년의 생활기록이다.


-결혼보다 소중한 인스턴트 저장창고

딸을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엄마의 식단은 정성과 영양은 가득했겠지만 난 친정엄마의 건강하다 못해 고집스러운 그 식단들이 싫었다. 아이들이 학교 앞 불량식품을 사 먹는 것도 가족들과 자장면을 시켜먹는 것도 부러웠다. 구멍가게 앞에서 친구들이 돼지바나 쌍쌍바를 입에 물고 인사라도 건넨 날엔 집에 돌아와 울음을 터뜨리며 그런 것을 사주지 않는 엄마를 새엄마처럼 매몰차게 대했다.  매번 “커서 딱 너같이 아픈 딸 낳아 길러보면 네가 내 마음 알텐데..”라는 한숨 깊은 말이 나와야만 생떼를 그만두곤 했다.

10대, 몸도 자라고 엄마의 정성도 통해 튼실하다 못해 우람해졌지만 엄마의 삼엄한 음식 감시는 계속됐다. 친구들과 라면, 떡볶이를 사 먹은 걸 들키면 녹즙을 먹어야 했고, 스팸이나 피자 같은 걸 먹으면 마즙이나 고로쇠 물을 코를 막고 들이켜야 했다.

플라스틱 병이 흔하지 않던 시절, ‘훼미리 주스’는 나를 위한 진한 고동색, 연한 고동색, 흐릿한 흙색 등의 약잿물들로 가득 차 본연의 주황빛을 띤 새 훼미리 주스병을 보면 낯설 정도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일어나”라는 소리 대신 케일과 당근이 서로 만나 몇 배는 맛없는 상호작용을 내는 ‘우우웅드롸롸롸롸’하는 녹즙기 굉음소리로 잠을 깼다.

이런 내게 20대 끝자락 사회생활하다 만난 남편과의 결혼은 여타 부분은 몰라도 건강한 먹을 것으로부터의 해방면에서는 천국과도 같았다.

지금이야 나를 죽이고 싶겠지만 당시엔 나를 죽도록 사랑한다던 사람과 사는 것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가면 컵라면, 스팸, 참치, 새우깡, 초코송이, 몽쉘통통이 가득 찬 찬장이 나를 반겨준 다는 것이 결혼의 묘미였다. 행복 그 자체였다. 천국이 있다면 우리 집 인스턴트 창고 속이었다.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정에 펼쳐지는 인스턴트 만찬

아이가 생겼다. 내 행복을 위한다고 인스턴트만 먹으며 아이에게 학대 같은 식습관을 이어갈 순 없었다. 다른 임산부들처럼 좋은 것을 찾아 먹었다. 아이를 낳고 수유를 하면서도 좋은 것을 해 먹었다. ‘수유만 끝나 봐라, 나 다시 행복하게 먹고 싶은 것 다 먹으면서 편하게 살 거다’ 이를 갈며 완모(완전 모유수유)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 먹이고 아이가 잠들면, 본격적인 완벽한 식사가 시작됐다. 비엔나 소시지, 청양고추 듬뿍 넣은 오징어 짬뽕 거기에 소주 한 병, 매일 자정이면 삶이 행복 쪽으로 궤도를 트는 듯했다.

어느 날, 잘 크지 않고 많이 보채던 아이를 데리고 큰 병원을 찾았더니 아이는 선천성 신장병이었다. 평생을 당뇨환자들처럼 한식 위주의 식단관리를 하며 나트륨이 많이 함유된 바깥 음식이나 인공첨가물이 든 음식을 멀리해야 한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친정에서 보내준 산, 들나물을 손에 물이 들도록 손질해 무치고, 아이가 빵을 먹고 싶어 하면 온갖 좋다는 재료를 사다 빵을 만들었고, 아이가 돈가스가 먹고 싶으면 돼지 등심을 사다 빵부터 갈아 돈가스를 만들었다. 그 돈가스를 찍어 먹을 케첩을 만드는 일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내 일상이었다. “딱 너같이 아픈 딸 낳아봐야...”라던 친정엄마의 말은 백설공주 속 마녀의 말처럼 저주는 아니었지만 난 그렇게 수년 전 나의 엄마처럼 아이에게 족쇄로 다가올 식탁을 차려내고 있었다.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는 나처럼 소아천식이었다. 이제 건강한 식탁을 차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지만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아이에게 차려주는 내 식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니 아이들 앞에선 건강한 식사를 이끄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으슥한 밤이 되면 다시 엄청난 양의 기름진 음식과 인스턴트,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마블링이 가득한 투플러스 한우와 삼겹살, 스팸은 와인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내 밤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아이를 안아 들어 올리는데 눈에 핏줄이 터졌다. 어지럽고 호흡이 가빠 아이를 안기도 벅찬 날이 많아졌다. 상태는 점점 심해져 이불만 들어도 눈에 핏줄이 터졌다. 고혈압이 찾아와 있었다.

내가 제일 즐겨 먹던 음식


-징그러운 것을 외면하고자 했던 탈출구

나야 아프면 그만이지만 내가 아파서 아이들 식사를 돌보지 못하는 날엔 아이들이 아플까 봐 그게 가장 큰 근심이었다.

고혈압에 좋다는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밤마다 친구 삼던 그 모든 것들이 고혈압에는 상극이었다. 고혈압도 문제였지만 나도 모르는 새 변해 버린 내장지방 가득한 내 뱃살도 보기 싫은 데서 그치지 않고 스트레스를 자극했다. 그 빈도와 양을 줄이기야 했지만 한 번 길들여진 식습관이 단번에 돌아올 리 없었다.

유튜브에 고혈압 관련된 것들을 계속 찾아보다 보니 어느 날, ‘검은 삼겹살의 유혹’이라는 MBC 다큐가 추천 영상에 떴다. ‘그래, 기름기 가득한 음식이 몸에 좋을 리 만무하잖아’ 마음을 다잡지만 영상을 보고 잠들기 전 과자봉지를 뜯는 건 무슨 의식과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과도 같이 그 다큐의 포스터가 내 눈에 띄었다. 다리도 못 편 어린 송아지가 눈만큼 큰 인식표를 찬 채 쇠철망 위에 쪼그려 있는 다큐 포스터, 뭐지? 하는 측은한 마음에 영상을 열었다. 분명 알고리즘을 통해 내가 열어본 것이지만 그간 고혈압에 좋은 음식 영상들을 찾아보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서서히 내 삶에 오고자 그건 단단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도미니언’ 지배자란 뜻을 가진 다큐였다. 영상 속 인간들은 9개월 품어낸 어미 젖소의 새끼를 빼앗았다. 착유기를 주렁주렁 매단 젖소들을 착유하기 편하게 회전목마같이 빙빙 돌렸다(상상은 끔찍했다. 내 아이를 먹일 젖이 도는데 회전판 위에서 돌려져야 할 판국이라니). 젖소를 생산 못 하는 수송아지는 태어난 지 5일 만에 머리에 총이 겨눠졌다. 대자연에서 친환경적으로 사육될 것이라 믿었던 호주의 소들은 세균들이 득시글한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항생제를 맞으며 인간에게 제물처럼 바쳐졌다.

무엇보다도 도축장에서 벌어지는 여과 없는 장면들. 옆 자리에서 함께 사료를 먹던 친구 소가 죽는 광경을 자기가 죽을 차례를 기다리며 지켜봐야 하는 소들, 어떤 소는 죽음을 직감하고 도망가려다 친구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자신의 죽음에 순응해야 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생명체다운 대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화도 났지만 징그럽고 무서웠다. 그동안 내가 먹던 모든 고기류가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접시 위에 올라온 것이라니.. 소가 태어나 풀을 먹고, 자라고, 도축이 되고, 내 식탁에 오르는 일련의 과정들 중 일평생 나는 ‘도축이 되고’ 부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는 음매~하고 큰 눈을 껌뻑이는 정겨운 동물 소이고, 내가 생각하는 소고기는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고이 포장된 먹음직스러운 선홍빛 덩어리였지 소와 소고기를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부터 난 고기만 보면 영상 속 낭자한 핏빛 속에서 살고자 발버둥 치는 소가 겹쳐 보였다. 고기를 입에 넘길 수가 없었다.

맨 부커 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난 주인공 영혜가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 리들로 가득 찬 꿈을 꾸고 고기를 입에 대지조차 못하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에게 “육식은 본능이에요. 채식이란 본능을 거스르는 거죠”, “정신적인 이유로 채식한다는 건, 어찌 됐든 육식을 혐오한다는 것 아녜요?”, “아무리 그래도, 고기를 아주 안 먹고살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영상 속 장면들 때문에 전혀 고기를 입에 대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냥 나에게 도육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 혐오스럽고 무서운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난 얼렁뚱땅 징그러운 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채식의 길 위에 올라서 있었다.

시작은 얼렁 뚱땅이 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3개월 만에 혈압은 정상수치를 벗어나지 않고 6개월이 지나자 손에 잡혔던 가슴의 지방종은 크기가 줄어들어 잘 잡히지 않았다. 몸 곳곳에 시도 때도 없이 생겨 날 창피하게 만든 종기들도 자취를 감췄다. 두 달에 한 번은 재발하던 임파선염도 더 이상 부어오르지 않았다. 놀라웠다. 내가 먹은 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채식에 덩달아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게 된 내 아이들에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고 칼슘뇨와 혈뇨를 보던 첫째 아이는 더 이상 혈뇨를 보지 않는다. 아침, 저녁 통과의례처럼 벤토린(호흡기 확장제) 치료를 했던 둘째의 호흡기 치료기는 베란다에서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고 냉장보관 중인 벤토린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채소와 과일로 상을 차린 결과물들이었다.

채식 후 내가 차린 콩돈가스 월남쌈
채식 후 내가 즐겨먹는 각종 채소로 맛을 낸 오일파스타


채식 후 젓갈을 넣지 않고 직접 만든 김치들

자연스레 채식이 습관화되고 있었지만 고기음식을 마주 대할 때의 핏빛 영상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떻게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고기에 대한 혐오를 지우고 하나의 생명체로 하나의 환경운동으로 여기며 생활할 수 있는지 존경스러웠다. 곱씹어 생각해 보니 그들에겐 나같이 회피가 아닌 목표가 있었다. 내가 동물을 해치지 않겠다는, 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몸을, 날 포함한 모든 환경을 지켜내겠다는 믿음과 목표가 선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처럼 혐오감에 몸을 떨지 않아도, 고기 앞에 눈을 찌푸리지 않아도 의연하게 채식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채식을 유지하는 이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첫째, 지카, 신종플루, 광우병, 코로나19, 사스, 에이즈, 메르스 같은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신종감염병의 75%가 우리가 동물들을 사육하는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방식들 때문에 유래되었다. 육식을 위해 숲을 없애고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함으로써 전염병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을 인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둘째, 세계 농경지의 83%가 가축에게 먹이기 위한 사료로 사용되는 GMO 옥수수나 콩을 재배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육식을 위해 동물을 키우고 동물 사육을 위해 토양을 낭비하고 소 1kg의 성장을 위해 10kg의 사료가 필요하다고 하니 동물을 먹이기 위해 굶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악순환이다.

셋째, 흔히 알고 있는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보다 농축산업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특히 이산화탄소보다 30배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소의 방귀와 트림에서 생겨나는 메탄가스)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젖소 한 마리당 하루에 400g이 넘는 양의 메탄가스를 배출하고 있고, 이 양이 1년간 쌓이면 중형 자동차가 1년에 2만 킬로미터를 운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사육되는 소가 약 14억 마리라고 하니 이는 필연적으로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기후변화는 전염병 확산을 부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채식은 이런 커다란 재앙을 막을 수 있지만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시작되고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극명한 동기들을 찾아보고 나니 나도 모르는 새 쓸모없이 지구를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있었던 삶에서 벗어나 환경을 위한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긍정적인 생각들이 자리하고 나니, 고기 요리를 봐도 고기를 먹는 사람을 봐도 무서운 감정이나 혐오감이 먼저 들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다면 저들도 나처럼 동참할 수 있을 텐데..’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채식을 시작한 지 2년이 넘은 시점에 비로소 내게도 지구를 위한다는 채식의 목표가 싹튼 것이다.


-만 번의 빵 반죽, 응원이 필요한 도전

채식을 시작하고 힘든 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건강을 생각하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라는 충고부터 “왜 먹지 않느냐”는 질문공세에 나 때문에 뭘 먹어야 할지 불편해하는 시선까지 더해져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식사를 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에 지쳐갔다.

또 하나는 빵을 끊어야 했던 일이다.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잃었고, 지인과의 브런치 시간을 빼앗겼다. 그러다 보니 가족을 비롯한 친한 사람들과 서로 멀어진 느낌이었다. 다 함께 잘 먹고 잘 살자는 건데 묘하게도 나만 혼자 고립된 감정을 지우기 어려운 일상이 지속됐다.

몇 번 시켜먹어 보았던 비건 빵들은 너무 건강을 강조한 나머지 뻑뻑한 경우가 많았고, 입맛에 맞더라도 과도한 비닐과 플라스틱 사용으로 과연 내가 이 빵을 사 먹는 것이 옳은 일일까 반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간 아이들을 위해 빵 만들기라면 도가 터있던 나는 “그럼 내가 만들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비건 빵 클래스를 찾아들었다. 배워온 빵을 직접 구워 나눠 먹는 것은 행복했지만 비 채식인이 먹기에는 담백하다 못해 지나치게 건강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만든 빵을 나눠주면 “이걸 왜 먹냐, 빵은 우유랑 버터만 들었고 동물을 죽이지 않았으니 그냥 빵은 먹어라.”는 말이 돌아왔다. 또 한 걸음 멀어진 느낌이었다.

음식을 탐닉하던 시절에 즐겼던 부드럽고 입에 쩍 붙는 빵을 만들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그날부터 나는 눈떠서 잠드는 시간까지 어느 날은 꿈에서도 빵을 구웠다. 들어가는 두유, 오일의 양부터 다시 계량하고 평상시 좋아하는 촉촉한 빵맛을 구현하고 싶어서 반죽을 하고, 망치고, 다시 반죽하고, 굽고, 데고, 다시 반죽을 하고,,, 오른팔에만 선명한 근육이 생길 즈음, 내 채식을 불편해하던 사람들과도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린 본인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고 만나 내가 만든 빵을 먹으며 예전같이 평화로운 대화를 즐길 수 있었다. 내가 구운 빵은 채식인과 비 채식인이 서로 거부감 없이 마주 앉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직접 만든 비건 브라우니


직접 만든 오렌지 케이크

생각해 보니 빵은 주식이 아니기에 매끼 강요받듯 해야만 하는 채식이 아니고 간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접근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세운 목표를 알리고 지구를 위해 작게나마 함께 실천할 수 있는 빵을 만들어 팔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궁극에는 전지구인이 초록 식탁만 차리기를 강요하자는 게 나의 목표가 아니다.

수요가 공급을 부르는 지극히 당연한 경제논리 앞에 작게라도 수요를 줄이다 보면 지구가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육류의 공급점까지는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시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두가 vegan이 되진 못 하더라도 한 번쯤은 지구를 위한 도전을 시작해 본 began이 되어 보는 것, 소수라는 이유로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채식주의자의 시도에 모두가 찬동하진 않더라도, 한 번쯤은 다수가 실천해 본 경험이 있어 소수인 그들에게 한심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에 응원을 바라는 맘으로 이 긴 글을 적는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시작에는 응원이 필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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