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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Jul 17. 2022

'앞'을 '벽'이라 읽는 아이에게.

중학교 2학년, 자율학기제가 끝나고 맞는 첫 시험에 모든 부모가 좌절한다고 한다.


그 좌절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불가하지만 나로 대입해 보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우주에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비교할 대상 없이 집에서 '자기주도’라 겉포장되는 식의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비교를 위해 나온 grade 식의 성적을 받고 보니 더 그랬던 것 같다.


성적만 놓고 보면 이 아줌마 왜 이러나 싶겠다. 아이는 2학년 1학기 중간, 기말, 수행(이 수행이라는 것이 과연 중간, 기말로 평가되는 지필고사와 뭐가 그리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을 합쳐 수학에서 받은 B를 제외하고는 A라는 성적을 받아왔다. 심지어 국어, 영어, 과학, 역사는 100점이나 96점이다. 그런데 이 엄마 뭐가 그리 큰 걱정이라고 묻는다면 이제 꼼꼼히 따져 답해보고 싶다. 정말 모든 부모가 원하는 성적보다 내성이 강한 아이를 원한다면 같이 답을 구해보고 싶다.


대한민국 공교육에 철저히 길들여져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부부는 서울의 좋은 대학들을 나왔다. 이름 괜찮은 대학들을 나와보았자 본인의 역량에 따라 그 그릇의 차이에 따라 담을 수 있는 것들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만큼 사회경험을 했다.


본인의 성향과 성격, 아주 작은 아이디어 하나에도 그들이 가진 타이틀을 넘어서 그들의 그릇에 넘칠 만큼의 재력과 경험을 담아내는 것을 목격한 중년이다.


반대로 타이틀이 벅찰 만큼 뛰어나도 그들의 자기 비하적, 자기중심적 성격이나, 사회성 부족, 뒤처지는 인성으로 탕평채 그릇에 간장만 담아놓은 것 같은 사람도 보았다.


우리 부부는 한 번도 서로 합의해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삶을 살지 않게 하겠다는 궁극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은연중에 아이가 학교 성적을 중요시하는 발언을 하면 책을 읽어서 얻게 되는 인문학적 교양(아이는 인문학적이라는 단어조차 모르겠지만)이나, 세계여행을 통한 세상 알기를 통해 아이의 성적 중심의 사고를 차단하려고 애써왔다.

세계여행도 남들이 생각하는 리조트나 휴양지가 아닌 로키산맥 캠핑, 뉴질랜드 일주 캠핑, 코카서스 3국 여행 등의 아이가 일반적으로 우쭐해지는 돈 쓰는 여행이 아닌 자연과 역사를 체험하는 돈 아끼는 지질한 여행(?)을 통해 자신의 과오마저 용서하고 싶게 만드는 대자연의 웅장함을 보여주고자 애썼다.


우리 부부가 아이가 성적에 목메지 않게 하기 위한 극단적인 예로,

아이가 중간고사가 코 앞이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가 좋아하는 해리포터 원서를 구해놓는다던지, 기말고사가 코 앞인데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보이면 시험 전에 프랑스 애니메이션 페어에 데리고 간다는지 하는 식이었다.(어떤 이는 묻겠다. 애 관심사에 프랑스 데려갈 만큼 돈이 있냐고. 이는 학원만 안 보내면 가능한 가장 싼, 비행이 경유 3번의 남들은 고사할 고달픈, 가계소득 범위 안에서의 행동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아이에게 본인 코앞에 놓인 시험지보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답지, 그 백지 위에 자신만의 답을 채워나가라는 바람에서 15년 공든 탑을 쌓았다고 생각했다.


자, 이쯤에서 밝히겠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시 강남구, 자영업자가 사업을 시작하려면 사교육으로 시작해야 가장 큰돈을 벌 수 있고, 사교육 없이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는 곳, 너 나 없이 사교육을 해서 사교육 없이는 일등 근처도 가 볼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그곳에서 외골수처럼 사교육 없이 그릇이 큰 아이로 키우겠다는(그릇이 크다는 의미는 모두에게 다르겠지만) 우리 부부의 철학은 개똥이었는가.


아이의 성적만 보면 강남에서 사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의 성적이 그 정도면 만족할 정도 아닌가 싶겠다. 하지만...



아이는 그 좋아하던 도서관 가는 길의 즐거움을 잊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면 그 시간만큼 학교 성적이 하락하는 순리를 깨달았다.

아이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고,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청년기 아이 본연 날 것의 심장을 뛰게 할 '제인 에어', '변신', '데미안' 등의 글들을 새기지 못했다.


읽고 생각하고 대화 나눌 공간과 그 시간 속 사색을 잃고 아이는 그 시간을 시험에 나올 교과서 속 문법이나 용어, 광범위하지만 함축적으로 응축되어 답을 요하는 것에 대해 묻는 것으로 채웠다.


난 아이들에게 공부가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은 이 원칙에 따라 본인 나이에 맞게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습득하는 데 애썼다.







손 닦기, 똥 닦기, 젓가락질, 본인 돌보기, 본인을 돌 볼 수 있으면 그다음 가족 살피기, 친구 살피기, 그다음 지구 살피기, 지구를 위해 채식하기 등으로 확장해서 가르치는 것 말이다.


그 각각의 살피기의 단계를 넘으면 비로소 너희의 인간됨이 성숙하고 '어른'이 되는 것이라 이야기했는데, 아이는 중학교 시험을 치르고 책과의 단절과 부모와의 대화 부족, 친구를 경쟁상대로 강하게 각인하게 되는 부조리를 느꼈다.


성적표를 받아 든 오늘, 아이는 엉엉 울었다. 엄마가 가르친 그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부라는 틀에 맞춰 열심히 노력했지만 세상은 본인보다 더 강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고,


난 아이에게 되지도 않는 위로를 했다. 네가 해온 것은 '앞'을 위한 것이지 '현재'를 위한 답답한 공부가 아니었다고..


아이가 답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 한 줄 읽지 못 한 대신 파고들었던, 좋아하던 문학 작품의 해체, 쾌감을 느꼈던 수학 풀이 대신 시간 내에 풀어야 했던 숫자, 원리가 신기했던 과학 대신 답해야 했던 규칙, 모든 것을 버리고 내가 얻은 것은 A, B라는 알파벳이라고.

앞으로 자신이 해나가야 할 남은 4년의 공부가 이런 것이라면 자신에게 펼쳐진 것은  '앞'이 아닌 '벽'이라고...


'앞'을 '벽'이라고 읽는 아이에게 난 이대로 사교육 없이 본인 스스로 공부를 계속해도 된다고 말해도 될까?


넌 이대로 치이고 긁히지만 다른 이 보다 많은 경험을 시켜줬다고, 사교육을 시키지 않은 부모의 자존감만을 채우고 너 스스로 나아가도 된다고 니 '앞'이 '벽'은 아니라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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