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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Jun 24. 2022

어느 동네 사세요?

자~ 빵을 다 굽고 포장도 끝냈다. 이제 택배사 사이트에 접속해 주소를 입력하고 발송만 하면 끝이다~힘든 몸을 토닥이며 주소 입력을 시작한다. 소소한 주문을 발송할 때는 이 단계에서 이미 퇴근한 것처럼 기쁜 감정이 몰아친다.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주문은 플랫폼에 저장된 주소 그대로 판매자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번거롭게 우편번호를 찾아야 한다던지 기재된 우편번호와 주소가 일치하는지 검증을 해야 하는 따위의 번거로움이 없다.

하지만 대량 주문이 있는 날은 택배 주소를 입력하는 그 순간부터 제빵이라는 육체노동의 굴레를 벗고 컴퓨터 업무라는 사무 노동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기업의 선물이나 개인 답례품 등 단위가 몇십 개가 넘어가면 고객에게 엑셀 파일로 받아 직접 택배사 시스템에 입력을 하는데 건네받은 주소는 취합한 것을 파일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편번호가 틀린다던지, 삼성동 7-3에서 -3이 빠져있다던지, 작은 오타로 아파트 이름이 틀린다던지 해서 꼭 검색창에 확인을 하고 주소 입력하는 과정을 추가한다. 웬만한 것은 그냥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로 보내다가 오배송으로 있는 코, 없는 코 된통 다쳐본 후로 빵 이면에 숨겨왔던 완벽주의 성향이 발동해 모든 주소를 검색 완료하고 입력하는 버릇이 생겼다.


@@동 $$$아파트를 검색하면 부동산 사이트와 연결되고 아파트 사진과 도로명주소, 지번주소가 나오고 그 아파트의 세대수, 면적별 매매 실거래가가 순서대로 나열된다. 처음엔 아파트 검색을 하기 전, 동네 이름이 신기하거나 예쁜 동네 이름, 궁금했던 동네 이름을 마주하면 동의 유래 등을 검색해 보곤 했는데, 사람 심리가 참 이상도 하지, 어느새 동네 유래는 패스 하고, 좋은(비싼? 아니면 좋다고 알려진? 형용사 고르기가 힘들다. 마음속에 동경해 본이라는 표현도 괜찮겠다.) 동네는 나도 모르게 손은 매매 실거래가를 클릭하고, 눈은 이 가격이 맞는 건지 오므렸다 폈다 하고, 입은 쩍 벌어져 있다. 이 모양 이 꼴로 주소 입력을 하고 있으니 속도도 느리고 고객 개인의 부동산 뒷조사를 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석연치 않은 경험이 꽤 있다.


이 부끄러운 기분을 없애기 위해 나만의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내가 그 집을 사야 해서 정보가 필요하지 않은 이상 실거래가 클릭하지 않기. 둘째, 아파트 대신 동네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는 것은 유익하고 재미있는 일이니 적어놓았다 택배 발송하고 찾아보기.

이 두 가지 규칙을 지키니, 예쁜 동네 이름보다 삭막한 아파트 이름을 더 익숙하게 여기던 속물근성이 잠잠해지고 그 자리에 무심코 지나쳤던 이정표 속 동네들이 친숙함으로 채워졌다. 또 한자로 되어있어 뜻이 애매하게 다가왔던 동네 이름들도 명확해졌다. 그중 몇 가지를 담아본다.


1. 강남구 논현동


논현동은 한자로는 논하다 논(論), 고개 현(峴) 자를 쓴다. 한자의 뜻만 보자면 동네 이름의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논하다 논자는 우리 고유어인 '논'을 한자로 표시하고자 소리를 차용한 한자라고 하니 논현동 뜻은 논을 사이에 둔 고개에 위치한 논고개이다. 실제로 논현동의 언주 역과 학동역 사이의 고개를 논고개라 불렀고 이곳은 지금도 언덕길로 유명하다. 70년 대 초 강남 개발 이전 강남이 논과 밭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2. 인천 논현동


강남구 논현동과 같은 이름의 인천 논현동이 있다. 강남의 논현동과 같은 논하다 논(論) 자,  고개 현(峴) 자를 쓰는데 인천의 논현동에서는 어르신들이 마을의 중대사를 망월산 고개 공터에 모여 의논한 데서 유래해 진짜 논의를 하던 고개의 의미로 썼다고 하니 같은 논현동인데 뜻이 다른 게 신기하다. 이 동네에선 인생 선배들의 지혜를 귀동냥할 수 있을 것 같은 지명이다.


4. 한남동, 응봉동 독서당로


역사를 시험용 암기로 익힌 내가 주소 입력 때마다 독서당? 이 당은 무엇하는 당인고 하며 무식 패치를 장착하게 만든 주소 이름이다.

조선시대 세종은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는데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자택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독서에 지장이 없도록 상설 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만들었다. 그 장소가 처음엔 마포 한강변에 있다가 갑자사화 여파로 폐지되었던 것을 중종 때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개경과 한양 도성에 있었던 고려시대 비구니 사찰)을 독서당으로 만들었고, 정업원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의견을 받아들여 한성부 두모 방 두모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 좋은 경치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두모포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을 설치하였는데 마지막 독서당이 위치했던 옥수동에서 뻗어 나온 길이 응봉동, 한남동으로 이어지며 독서당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왠지 이 동네에 살면 유유자적 책을 끼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상도 든다.



5. 강남구 삼성동


삼성동은 당연히 삼성기업 이미지 때문인지 별 셋(三星) 동네인 줄 알았다. 큰 별 세 개가 유독 잘 보이는, 아니면 별로 묘사되는 큰 인물이 셋이나 나왔다던지 하는 삼성 말이다. 그런데 삼성동의 한자는 三成洞으로 한자어 그대로 봉은사 근처의 마을과 무동도(과거 삼성동에 있던 마을로 이 마을 동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 이름이다. 이 섬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이 舞童(춤출 무, 아이 동)이었다.), 닥점(닥나무가 많이 있던 마을) 세 마을을 합쳐 하나의 동으로 만들어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삼성동(三成洞)이라 명명되었다.

지금의 삼성동을 떠올리면 코엑스를 비롯해 도심 인프라 밀집지역이 많아 섬이 있었다는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풍경과 경치가 수려하여 고려말 문신 복재 한종유의 별장이 있었고, 조선 세종은 무동도 섬을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이 섬은 과거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도 유명했으며 이 섬의 갈대를 베어 빙고(氷庫)의 얼음 보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1936년 이 섬의 모래와 흙을 뚝섬 제방용과, 경원선 철로 제방용으로 사용하며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압구정동 일대의 고층아파트를 짓는데 이 섬의 흙을 재료로 쓰면서 섬 자체가 사라지게 된 씁쓸한 역사가 있다.

봉은사에 가면 지금도 수해구제공덕비가 있는데 1925년 한강이 범람할 정도의 대홍수 때, 당시 봉은사 주지스님이었던 나청호 스님께서 절의 재물을 모두 풀어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무려 708명이나 구해낸 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덕비이다. 당시 봉은사에서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까지 뗏목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니 봉은사 일대가 물을 가까이 끼고 있어 섬이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봉은사 수해구제공덕비


6. 송파구 삼전동


원래 삼전동은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서 서울 근교의 다섯 나루 중의 하나로 다른 곳은 조수가 올라왔으나 이곳은 물이 밀려들지 않아 밭을 만들 수 있었어서 밭이 셋 있다 하여 三田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삼전동에 있던 삼전도(三田渡)는 조선시대 한양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로 세종 21년에 신설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삼전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을 하면서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 황제 앞에서 삼궤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를 올렸는데 청나라 황제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가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에 삼전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당시 인조의 부탁으로 오준(조선 중기 문인, 서예가)이 글씨를 썼는데 오준은 이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잠실역 3번 출구에서 성남대로를 따라 석촌호수가 쪽으로 걷다 보면 대로변 옆에 '삼전도비'가 있다. 롯데월드와 샤롯데극장, 롯데호텔의 장엄함에 밀려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이 잘 닿지 않지만 아픈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며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삼전도비



7. 중구 장충동


장충동 하면 현란한 간판으로 손님을 유혹하는 왕족발과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관인 장충체육관, 엄마가 즐겨 부르시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먼저 떠오를 만큼 익숙한 지명이다. 하지만 장충동이란 동명은 해방 이후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동네 이름으로는 역사가 짧은 축에 속한다. 장충동(奬忠洞-장려할 장, 충성 충)은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으로 장충단(奬忠壇)에서 유래했다. 1900년에 설치된 장충단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목숨을 바친 호위 충신을 기려 제를 지내던 곳이다. 제단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는 순종의 친필로 奬忠壇이라는 비석만 남아 있는데 이 일대를 광장, 놀이터, 분수대를 갖춘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터가 되어준다.


8. 중구 충무로, 을지로


최초의 근대식 영화관이 자리해 영화의 대명사나 영화인의 성지처럼 불려 와서 일까? 충무로는 이순신 장군의 묘가 있는 아산이나, 이순신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이순신 장군의 충절을 기려 제를 올리는 충렬사가 있는 통영처럼 한 번에 충무공 이순신과 연결 지어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충무로와 멀지 않은 옛 건천동에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났고, 일제 강점기 때 이 일대를 본정통이라 불렀는데 광복 후 일제식 명칭을 개정하면서 우리 명장의 이름을 딴 지금의 충무로가 되었다.

을지로도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 붙인 지명이다. 과거 을지로는 조선시대까지 진흙으로 된 언덕길이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 고개, 구리개라고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 때 중국 상인들이 이 일대를 장악해서 수나라를 격파했던 을지문덕의 이름을 사용해 중국 상인들을 몰아내고 싶어 하던 조상들의 염원이 담긴 지명이라 한다. 노가리와 먹태를 먹으러 을지로를 찾을 때는 한 번쯤 조상들의 마음이 담긴 지명 이름을 되뇌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찾아본 동네 이름들을 저녁 식탁 앞에서 아이들께 해주니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귀가 쫑긋해진다.

여러 분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네살고 계신지...

"저기요. 어느 동네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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