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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Nov 27. 2021

몰래 읽는 '육아 실록'

말갛던 아이의 얼굴에 곧 분화할 것 같은 여드름 몇 개가 송골송골하다. 몸도 제법 여자 티가 물씬 난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이 끓어오를 때가 있다. 몸도 마음도 자라 동글동글 익어가는데 신체의 단 한 부위 '입'만은 날로 날카로워진다. '어~어~엄~마~'하고 음률이 실렸던 내 호칭이 '엄! 마!'로 바뀐 지 꽤 됐다. 어디 호칭뿐이랴. 내 말이 30초만 넘어가도 "또 잔소리"란 즉답이 날아온다.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갱년기에 접어든 내게 살갑지 않은 말이 꽂힐 때면 꼭 찾아 읽는 '육아 실록'이 있다.




첫 말을 떼고, 아이가 종알종알 그치지 않고 말을 건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해가 지날수록 아이의 언어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는 건 신기함을 넘어 거의 매직쇼 관람 수준이었다. 아이의 말들이, 말속에 담겨 있는 우주 같던 생각들이 어느 날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까 봐 두려운 시절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말들을 기록해 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엄마가 자꾸 기억력이 떨어지나 봐. 어제 일도 오늘 흐릿해지지 뭐야. 그런데 제일 슬픈 건 너와 함께한 말들도 흐릿해진다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의 말들을 하루에 몇 개씩 적어놓는 거야. 그냥 무작정 적으면 무슨 말을 적을지 막막하기도 하고 재미없으니까 끝말잇기처럼 서로의 말을 받아서 이어 적어보는 건 어떨까?"  

엄마와 끝말잇기 게임도 하고 엄마의 기억력 회복에 본인이 일조할 수 있단 생각에 아이는 아끼던 새 노트를 들고 와 들떠했다.

"엄마 그럼 우리 이 노트 이름도 지어주자. '기억저장 노트' 어때?"

"완벽해!"

내 취지에 딱 맞는 그 노트의 이름이 맘에 쏙 들었다.



아이가 너무 좋아해 예쁘게 꾸며준 '기억저장 노트' "엄마 늙지 말고 건강하세요"란 말이 눈에 띈다.



'기억저장 노트'의 첫 시작은 간단한 단어들의 끝말잇기였다. 할 말이 많던 우리는 곧 끝말 문장 잇기, 혹은 수식어를 사용한 단어 잇기로 변형시켰고(예를 들어 "엄마를 사랑해"로 끝나면 '해'로 시작하는 말로 문장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문장을 마무리 해 상대방이 무슨 말로 시작할지 애먹어하거나 포기하면 본인이 이기는 '재미난 놀이'로 변질되어갔다.
 



     


'끝말 문장 잇기'의 흔적들. 아이는 내가 더 잘 기억하라고 날씨도 생생하게 적어주었다.




이 '끝말 문장 잇기'는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켰는데 아이가 날 이기기 위해 국어사전을 펼쳐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내가 조금씩 노트에 설명해 주던 모르는 단어들을 본인 스스로 형광펜으로 표시해 가며 일일이 국어사전을 탐닉했다. 아이의 언어가 담긴 시간을 기록하고자 했던 욕심이 아이의 어휘를 살찌우고 있었다.



 

다섯 살에 사준 '보리 국어사전'은 10년째 우리 아이들이 가장 많이 펼쳐 본 책 중 하나가 됐다.



국어사전을 끼고 있는 아이의 어휘는 이제 문장을 벗어나 문단으로 , 하나의 글로 확장되어갔다. '끝말잇기'에서 시작된 우리의 기록은  '생각 잇기' 놀이로 변형되었는데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빼곡히 적어 상대방의 공감을 얻으면 이기는 것이었다.







첫째 아이와의 이 기록들은 4년쯤 이어졌다. 매일매일 적던 2년 정도가 지나고 친구들과의 시간이 더 소중해지는 시기가 되자 자연스레 횟수가 줄고 둘째와의 기억저장 놀이로 이어졌다. 둘째는 남자아이라 그런지 엄마의 기억력 저하를 깊게 공감해 주지 못해 진득하게 문단 잇기까지 못 했지만 첫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것을 오래 지켜봐 왔던 터라 모르는 말들을 국어사전 찾아보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당시에 별생각 없이 시작된 이 행동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국어사전이 갖고 있는 완벽한 문장 구조와 적절한 예시 덕분에 아이들의 어휘력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이번 주말에 친구들과 놀아야 한다는 허락을 받을 때도 적절한 수식어구와 논리적 반박을 할 수 없는 타당성을 근거로 말을 꺼내니 쉬이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해 곤란한 경험이 적지 않다. 논술이나 글에 관련한 학교 행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오는 것은 물론이고, 적는 것이 습관이 되어 노트 필기가 수준급이라 상점이 곧잘 쌓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궁금한 것을 직접 찾아보았던 습관은 사교육 없이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발판이 되어준다.



양이 상당한 아이와이 기억저장 노트들



아이의 말이 날카롭게만 느껴지는 날, 저 노트들을 꺼내어 읽는다. 아주 사소하게 지나쳤던 그날의 날씨부터 함께 나누었던 속 깊었던 이야기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지면 속에서 숙성된 감정들이 알알이 빼곡하다.

표지엔 기억저장 노트라 적혀있지만 아이와 함께 적은 '육아 실록'이다. 그 시절 우리가 품었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우리만의 역사실록...


사춘기 아이는 내가 저 노트들을 읽는 걸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본인의 서툰 글씨와 덜 익은 생각들이 낱낱이 담겨 있으니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래서 꼭 몰래 읽는다.



아파트 화재경보시스템이 요란하게 오작동된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불이 나면 제일 먼저 뭘 챙겨나갈 거야?"

"나? 알면서~ 뭐겠어? ㅎㅎㅎ 제일 소중한  '기억저장 노트'지"

.

.

.

.

.

지난번 쓴 '다 탕진하고 싶은 엄마의 유산'을 읽고 정말 독서만 시켰냐는 질문을 몇몇 지인들에게 받았다. 이 '육아 실록'이 그들에게 좋은 답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앗. 그런데 오해하시면 큰 일이다. 독서를 시키고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적어야 한다고 말이다. 강요하는 책읽기와 적기보다 서로의 생각에 대해 메마르지 않는 관심과 대화, 작은 것까지 공유하고픈 애정! 그것이 독서와 적기보다 먼저라고 살짝 귀띔하는 것을 눈치채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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