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마음을 다듬다

느리게 걷는 마음: 3부 감각을 확장하는 일

by 선율

물감이 번진 듯한 오후, 나는 미술관을 향해 걷는다. 특별히 누구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공간이 주는 고요함이 그리웠던 날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미술 교과서 속에 있던 고흐의 붓자국, 모네의 연못, 정물화의 배경에 깃든 그윽한 어둠. 나는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진 않았지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 아무런 역할도 기대받지 않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 미술관은 나에게 그런 공간이다.


그림을 마주하면 내 마음과 정신이 조용히 집중되는 걸 느낀다. 외부의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눈앞의 화면과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순간. 붓의 흔적을 따라가고, 색채가 겹치는 결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깊은 고요로 빨려 들어간다. 그림은 소리 없이 말을 건네고, 나는 그 말을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느끼려 한다. 말이 아닌 감각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마음이 정돈되고 정신이 단정해진다. 미술관은 내게 하나의 명상실처럼 느껴진다. 눈으로 감각하고, 마음으로 호흡하는 그런 공간.


요즘은 미술관에도 사람들이 많아졌다. 전시 오픈 첫날이면 긴 줄이 늘어서고, 유명한 작품 앞에는 늘 북적이는 인파가 모여든다. 때로는 사진을 찍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음으로 인해 집중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나는 나만의 고요에 이르곤 한다. 붐비는 공간 안에서도 그림 앞에 서면 어느새 소리들이 멀어지고, 나와 그림만이 존재하는 틈이 생긴다. 마치 소란을 뚫고 만들어낸 작은 명상의 구멍 속으로 내가 스며드는 듯하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혼자 몰입할 수 있는 경험, 그게 미술관이 주는 신비로운 힘인 것 같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그림을 좋아해서 이런 몰입이 가능한 걸까? 아니면 그림이라는 매체 자체가 사람의 감각을 그 본성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림을 보면 누구나 ‘좋다’ 혹은 ‘잘 모르겠다’는 아주 본능적인 반응을 먼저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왜 좋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림은 그런 식으로 사람의 감정을 두드리고, 언어로 표현하기 전의 감각을 건드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솔직해진다. 판단이 아닌 느낌으로 바라보고, 의미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나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고,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른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나의 감성을 충전하는 데 있어 어떤 취미나 활동보다 풍요롭다. 색의 조화, 선의 흐름, 캔버스의 여백, 그 모든 요소가 내 안의 감각을 깨우고, 묵은 감정을 덜어내듯 마음을 맑게 만든다. 특별한 지식 없이도 그림 앞에서는 누구나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미술관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삶의 균형이 흐트러질 때, 감정의 방향을 잃을 때, 나는 다시 미술관을 찾는다. 그림은 늘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 마음의 틈에 들어와 앉는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미술관은 감상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마음을 다듬는 장소라고. 그림은 단지 눈으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내면을 정돈하게 해 주는 조용한 친구라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다듬기 위해 그림 앞에 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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