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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Nov 04. 2021

밤잠

 새벽을 욱여넣은 아침이 오면, 눈 밑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그늘져있다. 밤잠을 설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이 밝으면 이렇게 힘겨워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간약한 생각들은 밤새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불면증을 야기시키는 생각의 꼬리는 똑같은 모양으로 매듭지어져 있었다. 한 줄로 쭉 늘어선 모습이 마치 천의 끄트머리를 묶어 길게 이어놓은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이 건물이라면, 이미 옥상 가까이 불길이 치솟았을 것이다. 그럼 이 생각의 꼬리들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건물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밧줄이 될까, 아니면 새까맣게 타버리게 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몇 날 며칠 이 생각의 꼬리들에 잡혀 사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정답을 깨닫지 못했다. 애초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잠을 설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각은 참으로 무의미한 결과만을 펼쳐놓았다. 마치 내 인생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터무니없는 드라마들이 펼쳐졌다. 때론 나에게 관대했다가 때론 나를 해치기도 하는, 병도 주고 약도 줬다가 혼자 블루스를 추는 참으로 뜬금없고 이상한 생각들이었다. 이걸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상력이 오늘 나의 긴 밤을 또 한 번 망쳤다.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는 지금, 나는 촉촉해진 눈을 비비고 감았다. 나의 내면에서 속삭이고 있는 영혼은 어떤 마음인 걸까. 조금 지쳤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지겨우나, 이것을 달리 어떤 '감정'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애매했다. 화가 나는 것도, 슬픈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오묘함 속에 마음은 끊임없이 핑-퐁 핑-퐁 거렸다. 잠을 자야 하는데 이제는 끝없는 걱정들이 펼쳐졌다. 걱정을 하다 보니, 이젠 진짜 무엇이 걱정인지도 몰랐다. 하나의 걱정은 또 한 녀석의 걱정을 데려왔다. 걷잡을 수 없이 거친 생각과 고민과 걱정들은 손을 맞잡은 바이러스처럼 제 몸을 부풀리며 증식하기 시작했다.

  처절한 상상력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내재돼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막막함과 어떻게 살고 싶다는 계획, 그리고는 문득 절교한 친구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러고 다시 잠에 들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헤어진  연인이 떠올라 한참을 괴롭혔다. 또는 며칠 전의 계획  하나였던 필사를  마치지 못한 것을 떠올리고는 '마저 쓰고 잘까'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인들 어쩌랴.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한 새벽에 당사자만 피곤할 따름이었다.

 밤잠에 들기 전에 밀려드는 수많은 생각은 결국 고집이었다. 사실 모든 걸 놓아버리면 편했다. 이렇게 살까, 저렇게 살까, 그냥 내버려 둘까, 그래도 시작해볼까. 자신 안에서 수없이 싸우는 그 무의미한 독백들이 밤잠을 망쳐놓는 것이다. '내일 생각하자'고 고개를 흔들어버리고는 눈을 감아버리면 되는데, '내일 생각하자'는 의견은 내면에서 처참히 묵살되었다. 이미 그 의견은 곳곳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는 흘러가는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계를 다시 보니 어느덧 새벽 4시가 되어있다. 잠을 자기에도 애매해, 깨어있기에도 애매해. 그때부터는 정신도 점점 몽롱해지고 아득해진다. 잠은 안 오고 몸만 피곤해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괴로운 새벽, 오늘도 어김없이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부딪히고 다툰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다. 이토록 다양한 생각들을 펼쳐놓아도 그 안에 '정답'은 없었다. 이 생각도 아니고, 저 생각도 아니면 대체 답은 뭘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건 아니야'라고 고개를 저을 수 있던 것은 아닐까?

 벌어진 과거는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이 시간을 현명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자는 것이다. 잠을 자야 과거도 달리 생각해보고, 미래도 차분히 그려나갈 수 있지. 애써 복잡한 생각을 덮고 잠에 청한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천천히 그 생각에서 멀어질 것.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내뱉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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