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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Sep 06. 2022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나는 어릴 적, 작가를 꿈꾸면서 한 가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나는 왜 작가가 되고 싶은 걸까?'


 돈벌이도 안 되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를.

 어쩌면 작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따뜻한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단지 멋져 보였기 때문에, 나는 중지가 무르도록 매일 밤 글을 쓰고, 등단을 하지 못해 저민 가슴을 쥐고 울었을까. 그때는 명확한 이유 없이 단순히, 글만이 힘 있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수단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은, 대학 때 들어서였다. 그때 대학교 방송국 활동을 하며 영상 제작을 처음 접했다. 유독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영상 제작에 빠져 있던 그때 국문과 선배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넌 영상 만드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작가는 왜 되고 싶어?"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그럼 넌 책을 읽고 단 한 번이라도 울림을 받은 적이 있어?"


 그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까지 어떤 이의 책으로 가슴 깊이 울림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문학이라는 것은, 단지 학문의 하나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누군가 명작이라고 하는 책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나는 그 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었다. 저 인물은 어떻게 그려졌고, 저 인물을 대척하는 악역은 이렇고, 이 콘텐츠의 전체 구성은 이렇고, 아주 작은 액자식 구성은 이렇고, 열린 결말이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며, 여기에는 어떤 색깔이 느껴지는가 하는. 감성적이고 공감이 그득한 글을 쓰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책을 읽을 때만큼은 공감이 결여된 사이코패스였다.


 그 길로 나는 바로 PD를 준비했다. 나에게는 아직 문학이라는 글이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연륜과 지식이 부족하기에,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사회경험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느꼈다. 많은 경험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는 사이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단단한 사회경험으로 결집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면서, 이런 인생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랬다. 그 당시에 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수단은 필요치 않았다. 결국 내 평생의 꿈이었던 작가를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나의 이십 대는 열정 많은 시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방황의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때는 나의 길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만 살면 PD가 될 수 있어, 작가는 언젠가 내가 커리어를 쌓고 나이가 들어 할 수 있을 거야, 나에게는 연륜이 부족하니까. 그것이 마치 인생의 진리인양 살았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그것만이 완벽한 현실이라고.


 그러나 내가 생각한 모든 계획들이, 단계를 탄탄히 밟아가면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현실이, 아주 헛된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PD를 향한 꿈, 작가를 향한 열망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살았는지를 잃어버렸다. 

 인생이 참으로 덧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발버둥을 쳐도, 나는 경쟁자들에 비해 한없이 볼품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괴로운데 사람들은 왜 인생을 살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삶에 정답을 찾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밤마다 울며 가슴을 때렸다.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하는지도 잃어버렸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꿈만 바라보며 좇아가던 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현실을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그저 순수하게 꿈만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이 나았다고. 남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가락질하는 목표가 나에게는 소중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찬란하고 반짝거리는, 그 아련했던 순간들이.



 밀려드는 암울한 감정들은, 내 흰 티셔츠에 짙은 회색 물방울로 서서히 번져갔다. 턱밑으로 쏟아지는 우울한 감정들을 닦을 때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 들었다. 우울의 파도는 쉼 없이 내 영혼을 향해 덮쳐왔다. 두려웠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날 놓아버리게 될까 봐.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다시 연필을 집어 들었다.


 엉망진창으로 휘갈겨쓴 문장은 그 필체처럼 처절했다. 그날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에 몇십 편의 일기를 쓰기도 했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얼마나 깊이 빠져들어가는지, 내 우울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 지를 보고 싶었다. 지친다는 말보다 더 시꺼멓고, 죽고 싶다는 말보다 더 암담한 말은 '버겁다'는 문장이었다. 나는 매일 버거운 마음을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것처럼, 한 겹 한 겹 벗겨냈다. 글을 쓸 때마다 눈물은 마르지 않고 범람했다. 깊이는 해저만큼인데, 눈물은 폭발하듯 튀어나오는 수문 열린 댐처럼 흘러넘쳤다.


 그렇게 얼마나 글을 쓰며 감정을 소진했을까.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처절하게 써 내려갔던 계획이나 감정에 대한 기록들, 밤낮없이 울부짖던 시간마저 메말라버렸다. 이제는 아주 암울한 기분만 가슴 밑에 깔려, 온종일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 톡 하고 건들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그러나 생각보다 담담한 감정. 오히려 그런 우울감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더 이상 열심히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목표를 잡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목적 없이 수많은 하루들이 쓰러져갔다.


 그런 어느 날, 우연히 한 서점에서 어떤 책의 한 문장을 발견했다.


 "괜찮아"


 그 자리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사실 내가 에세이를 쓰면서도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책이 너무나 가볍게 쓰이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지 읽기 쉬운 에세이를 쓰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았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일상을 살아하는 타인의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던 날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오히려 어떤 책의 '괜찮아'라는 한 문장을 뜨겁게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문장은 어떤 영화보다 강렬하고, 그 어떤 드라마보다 뭉근한 문장이었다. 누구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었고, 나라도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쉬운 한 문장이었음에도, 그날 그때의 내 마음에 정통으로 꽂은 한마디 글자였다.


 서점에 다녀온 후로, 나는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언젠가 열정에 휩싸였던 때, 그래도 그중에 아주 얕은 슬럼프를 경험하는 날들에 쓴 일기들. 그 일기에도 똑같이 "괜찮아"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고. 그 외에도 "할 수 있어", "느리게 가도 돼", "인생은 길어" 같은 말들이 촘촘히 가슴에 박혔다. 이상하게도 그 쉬운 위로의 말이 나에게 뜨겁게 와닿았다.


 나는 늘 내가 쓰고 싶은 글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에 대한 글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등단이나 문학상만을 바란 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글은, 작가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그 글을 필요로 하는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걸. 그저 단순히 와닿지 않은 문장으로 읽히는 것이 아닌, 가슴속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위로를 주는 글은, 공허한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때론 뜨겁게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때야 나는 글을 쓰는 방향을 찾게 되었다.


 나는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며 조금 채워진 마음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너무나 많은 감정들을 쏟아내고 게워낸 아침이었다. 배고플 때 급하게 음식을 먹으면 체하듯, 텅 빈 마음에도 조금씩 감정을 채워 넣어야겠다고. 그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천천히 되찾아가자고. 다시 한번 천천히 되새기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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