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카메라에 담긴 기억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축축한 느낌이 든다. 맑은 하늘 아래 후텁지근한 여름햇살로 찬란할 것만 같던 그 시절의 추억은, 필름 카메라 속에선 어쩐지 묵직하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바닷바람에 쇠기둥이 산화되어 부서지듯, 기억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흐려지고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걸 선명하게 기억나게 해주는 것이 사진의 역할일까? 그래서 필름사진은 더 진하고, 어둡고, 짙은 걸까.
언젠가부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기 시작해 말하지 않는 버릇을 들이던 나는, 어느 순간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소식이라거나 나쁜 일들도 터놓지 않게 되었다. 대신 누군가의 마음을 묵묵히 들어주는 이가 되었다. 누군가의 감정쓰레기통으로 또는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 선인장 같은 사람으로. 그렇게 선인장처럼, 때론 바위처럼, 그저 가만히 있는 사람. 그런 조용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인에게 상처 입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는 건 아니다. 이젠 굳이 내 속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일도 지겹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혼자서도 무척 바쁘게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타인을 만나 에너지를 쏟거나 혹은 에너지를 얻던 순간들도 나에게는 벅찬 시간이 되었다. 홀로 고립되었다고 안타깝게 여기는 이도 있었는데, 아무렴 상관없었다. 저마다 마음을 치유하고 휴식하는 방식이 다른 법이니까.
어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을까. 어떤 사건이 있었을 텐데,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확신컨대, 말을 않게 된 이 모든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뀐 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영혼은 언젠가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신나게 쏘다니던 이십 대가 저물던 즈음부터였을까. 나의 삼십 대는 힘이 없었다. 이제는 애써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쏟아가며 말할 이유가 없다는 걸, 거기에 어떤 가치나 보상도 없다는 걸, 삶이 그렇게 썩 재미있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이 삶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땐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몇 시간째 같은 대화를 하며, 시간의 틀 안에 갇혀 맴돌기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왜 나는 타인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끊임없이 나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나름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계획이 모두 무너지고, 엉성하고 어리숙하게 하루를 헤쳐나갔던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을 무척이나 미워했었다. 늘 부족한 것만 보였고, 그랬기에 마음은 또 늘 조급했다. 하지만 그랬던 나의 생을, 그때의 나는 어쩌면 사랑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끊임없이 타인과의 대화로 에너지를 얻고 싶어했고, 또는 에너지를 주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지금의 나에게 '기억'이란, 또는 '추억'이란 그저 아름다운 그리움만은 아니다. 어쩌면, 예전의 나는, 내 마음의 방에 숨겨두었던 기억을 아주 좋은 시절이었노라고 포장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양지바른 곳에 놓여 따뜻한 햇살에 몸을 쬐며, 곰팡이나 누린내라곤 하나도 없는 말끔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나에게 기억은, 그런 어떤 '아름다웠던 추억'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하나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축축하고 무거운, 가슴 한 편이 애잔하고 아린 기억으로, 가끔 꺼내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묵은 상자처럼 보였다. 먼지가 그득 쌓여, 가슴에 품고 있으면 왠지 그때의 아픈 순간들이 다시금 떠오를 것만 같은 기억들. 나에게 기억은 선명한 고화질의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진한 슬픔이 묻어 나오는 필름사진이 되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어쩌면 눈물에 절어 곰팡이가 슨, 녹슨 상자들같이.
찬란한 영광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도 말할 수 없는, 어느 기억의 한 조각은 그렇게 가슴 아리게 남아 내 마음속 서랍에 들어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의 방을 정리하는 날, 그 해묵은 상자를 다시 열어 보일 일이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글쎄, 그게 어떤 표정이 되든, 내가 살아왔던 생을 그저 미워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