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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탄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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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Aug 28. 2024

1. 육상선수 유망주


 "네! 정수진 선수! 지금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 한 두어 명 보이는 것 같은데, 정확히 내가 몇 등인지는 가늠이 오지 않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서 눈앞이 노래졌다. 입술이 마르고, 가슴은 벅차서 더 이상은 힘들었다. 관중석에 앉은 부모님의 응원소리와 트랙 옆에 선 체육선생님의 고함이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귀에 아주 얕은 이명과 함께, 나는 깊은 물속에 풍덩 빠져 잠수한 듯한 먹먹함을 느꼈다. 꽉 막힌 고막엔 그저 거친 나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 체육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귀를 뚫고 들어왔다.

 "정수진! 정신 차려! 스퍼트 올려!"

 바로 눈앞에 3등의 등이 보였다. 결승선까지 100m가량 남아 있었다. 내가 쓸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힘을 다해 달렸다. 이미 800m를 뛴 후라, 전속력으로 달린다고 해도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팔, 다리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저어졌다. 나도 내 속도를 어떻게 주체할 수 없었다.

 관중석에서는 이미 박수와 함성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박수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눈에 보이는 형태였다면, 아마 반짝거리는 윤슬이지 않았을까. 그 반짝거리는 소리들이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트랙 위에 몸을 나뒹굴었다. 입술이 파래진채로 침을 흘렸다. 체육선생님이 와서 내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물을 건네셨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물을 마실 수 없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4등, 미래중 3학년 정수진…"

 나는 육상선수 유망주는 아니었지만, 체육선생님은 내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예선전에선 높이뛰기 선수로 출전했지만, 긴장한 탓에 보기 좋게 미끄러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간히 준비했던 800m 육상경기에서 금메달을 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결국 이렇게 본선으로 와서, 쟁쟁하다는 다른 학교 선수들과 겨루었다. 육상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내가 말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들, 함성들, 그리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이 한참 동안 내 주변을 에워쌌다. 죽기 직전까지 내달렸지만, 나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다. 내 인생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


 수진아, 수진아….

 귓가에 아련하게 울려 퍼지던 엄마의 목소리에 수진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정수진!"

 엄마는 이부자리 누워있던 수진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의 얼굴에 짜증이 조금 묻어있었다.

 "지금 몇 신 줄이나 알아?"

 수진은 말없이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들었다. 시간을 확인한 수진이 다시 베개 위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아, 방학이잖아. 좀 더 잘래."

 엄마는 수진의 엉덩이를 팡팡 때리며 말했다.

 "좀 더 자긴 뭘 자! 이제 곧 저녁인데!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 참고로 오늘 엄마 아빠 없어."

 수진이 엄마를 다시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

 "응, 이따 저녁때 모임 있어."

 "나도 가야 돼?"

 "넌 안 가도 돼."

 심드렁한 엄마의 목소리에 수진은 다시 엎어져 누웠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좀 만나고 그래! 예전엔 잘만 만나더니…."

 "아,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해."

 수진은 누운 채로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한때 중학교 체육선생님의 꿈이자, 중학교 대표 육상선수 유망주로 이름을 알렸던 수진은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모든 꿈을 내려놓았다. 다들 재능이 있다고 말했지만, 수진의 부모님이 느끼기에 수진은 육상에 재능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의 그 생각은 수진이 마지막으로 달렸던 800m 본선에서 더 커졌다. 그 경기에서 수진의 실력은 그대로 발가벗겨졌다. 더 어렸을 때부터 육상을 했을 선수들 사이에서, 고작 몇 달 훈련한 걸로 메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거의 말라죽기 직전까지 달려 겨우 4등을 해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 이 세상엔 1등이 아니면 인정해주지 않아. 특히 네가 하려는 스포츠에선 더더욱 말이야.

 수진이 달려 나가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어쩌면 수진이 꿈꾸는 세상과 부모님이 꿈꿨던 세상은 같은 세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꿈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수진은 겪어보지 않은 현실이란 세상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수진은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투쟁이란 투쟁은 다 해보았다. 밥도 굶어보고, 학교도 안 나가고,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의 벽은 무척이나 완고하고 단단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 부모님 설득했어?

 중학교 3학년 졸업 무렵, 수진의 친구들의 대화 화두는 단연 "고등학교 진학"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진의 진학이 핫이슈였다. 육상부 활동을 하며 친해진 친구들이 전부였으니, 당연히 수진의 친구들 역시 체육고를 가겠다고 한 것이다. 반면 수진의 부모님은 수진이 일반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기를 원했다. 수진은 친구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수진의 세상에서 전부였다. 수진이 중학교 육상부로서 마지막으로 달린 날,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헛구역질을 해대던 그날에 친구들은 모두 수진의 4등을 축하했다. 대단해! 진짜 너 육상 천재 아니야? 훈련도 안 받았는데 본선진출까지 했잖아! 친구들은 수진이 조금만 더 훈련을 하면 멋진 육상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수진의 아빠는 여전히 완고했다.

 ─ 지금이야 육상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겠지. 근데 나중에 대학교 가서 새로운 걸 해보고 싶으면 어떡할래? 지역 본선에서 4등 한 실력으로, 나중에 경쟁에서 밀리면 어떡할래? 육상이 전부가 되면, 나중엔 선택지가 없어. 굶어 죽어도 무조건 육상 해야 되는 거야. 그건 육상 천재도 힘들어.

 수진은 아빠의 쏟아지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빠의 말은 뾰족한 바늘이 되어 수진의 가슴을 찔렀다. 겪어보지 않은 미래를 수진이 알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아니야,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아빠가 무심코 내뱉은 '지역 본선에서 4등 한 실력'은 어떻게 해도 번복할 수 없는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진은 부모님의 생각을 꺾지 못하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택했다.

 ─ 아쉽다. 그래도 수진인 공부도 잘했으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졸업하던 날 다 함께 즐겁게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며 하트를 눌렀다. 수진은 그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받을 수 있는 모든 하트를 다 받고 돌아다녔다. 왠지 그 순간 누른 하트만큼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수진은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SNS에는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추억들이 가득했다. 함께 셀카를 찍고, 맛있는 걸 먹고, 동전 노래방도 갔던 모습들. 아무 생각 없이 SNS 피드를 올려보면 수진은 어떤 한 사진에 손가락을 멈췄다.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놓은 사진과 구멍 난 흰 양말을 보며 깔깔거리는 친구의 모습이었다. 아직도 붉게 눌린 하트, "ㅋㅋㅋ"하며 즐겁게 웃는 친구들의 댓글들이 보였다. 수진은 왠지 가슴 한 편이 먹먹해졌다.

 고등학교 진학을 한지 벌써 한 학기가 지났다. 여름방학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어느덧 개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진은 사실 인문계고등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나 무리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수진에게 먼저 와서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수진은 어떻게 친구들에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밥을 혼자 먹기 시작했고, 교실에 혼자 앉아 있기 시작했고, 체육시간에도 따로 동떨어져 앉아있곤 했다. 수진은 홀로 고립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학교를 마친 후 운동장 주변을 걸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결심하던 순간, 다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 다독였던 순간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아니, 괜찮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차마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덤덤히 읊조리며 눈물을 닦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수진은 반 애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가갈 용기가 없어 허무하게 흘려보낸 하루도 많았다. 어쩌다 힘겹게 다가가 밥을 같이 먹어도, 수진이 모르는 대화들만 오갈 뿐이었다. 그런 하루들이 쌓여 벌써 몇 달이 흘렀고,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났고, 수진은 '친구 없이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버렸다.

 체육고에 진학한 친구들의 SNS를 보며, 수진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옛 친구들은 훈련하며 흘린 땀을 보여주며 건강한 목표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한때 육상이 꿈이었던 수진은 순간,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했기 때문에? 800m 육상에서 4등을 했기 때문에? 높이뛰기 장대를 넘지 못한 때문에? 육상부에 들어갔기 때문에? 어쨌든 이 모든 이유들은 다 수진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은 자신의 SNS 피드에 있는 구멍 난 양말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 육상 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윤슬처럼 쏟아지던 관중석의 박수갈채, 헛구역질을 하며 쏟아내던 이마의 땀방울, 결과와 상관없이 어깨를 두들겨주던 친구들…. 수진은 그때의 영광을 다시 되살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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