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중 가장 적은 돈을 받고 일했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방송작가'를 하던 시절이라고 말하겠다.
'방송작가'라고 하니, 내가 마치 거창한 꿈을 가지고 방송작가를 시작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는데, 사실은 아니다. 내가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에는 돈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방송작가가 주급 25만원, 그마저도 세금을 떼면 월급이 100만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시작했다. 그런데도 내가 방송작가가 되기로 선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시절, 나는 서울 대도시의 방송작가를 꿈꿨다
한 반에 20명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시골 중학교를 나온 나는, 도시 생활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글이든, 그림이든 예술 창작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딱히 예술 분야로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시골에서는 생소할 수 있는 '방송작가'라는 직업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시골 중학교로 첫 부임을 해온 한 국어선생님 때문이었다.
국어선생님은 처음부터 임용을 준비한 건 아니라고 하셨다. KBS에서 방송작가를 하시다, 뒤늦게 국어선생님이 되셨다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종종 KBS 방송작가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다. 특히 연예인을 만나 복도에서 사인받는 일은, 중학교 여학생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늘 그랬듯, 그 시절의 나도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다.
"선생님, 정말 방송작가가 되면 연예인을 만날 수 있나요?"
두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내가 글쓰기에 매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낙엽을 붙이며 시화전을 그리던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나의 시를 보고 처음 입을 떼셨다.
"너 문학에 소질이 있구나?"
그 길로 나는 각종 백일장과 공모전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실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정말이지 짜릿한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방송작가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해 점점 소설가에 대한 열망으로 꿈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그 시절 중학교 소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작가'를 택하다
은사님과의 연락은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에 갈 무렵까지도 주욱 이어졌다. 방송작가가 되겠다던 중학교 때의 꿈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옅어졌다. 그 무렵 나는 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했음에도,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오른손 중지가 무르도록 글을 썼다. 수십 개의 연습장을 버려가며 겨우 경장편 소설 하나를 집필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말끔하게 떨어졌다. 등단하고 싶다는 열망은 고등학교 3학년에 가까워지자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문예창작학과와 국어국문과 중에서 진학을 고민하던 나는, 은사님이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학교에 덜컥 원서를 넣었다. 왠지 국어국문학과에 간다면 문학에 대해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의 머릿속엔 오로지 소설가에 대한 꿈뿐이었다.
나는 대학교 방송국 동아리 활동과 문예창작 동아리 활동을 병행하며 부지런히 습작을 했다. 문예창작 교수님이 아님에도, 문학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을 찾아가 원고를 들이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렵 나의 수많은 습작품들은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몇몇 공모전에 수상하기도 했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았다. 그 조급한 욕심은, 나를 한없이 부족한 사람으로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현재의 내가 세상의 단면을 담아내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아직 세상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탓이라 여기며, 그렇게 소설가로서의 꿈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렇게도 소설가에 대한 꿈이 컸던 내가 방송작가를 택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 무렵이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글을 지속적으로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중학교 시절의 내 꿈을 잊지 않았다. 지금 이 시기에 내가 방송작가를 경험해보지 못한다면, 과거의 중학생인 내가 무척이나 실망하지 않을까. 그래도 언젠가 내가 간절히 바라던 꿈 중 하나였는데, 해보지 못한다면 나이가 들어 무척 후회할 것만 같았다.
주급 25만원, 꿈을 갖고 현실을 배우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나의 출근시간은 일반 직장인과 다르지 않은 10 to 7였다. 메인작가님들도 다 출근하셨기 때문에, 막내작가인 내가 출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인턴으로 시작한 방송작가는, 졸업과 동시에 막내작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 과도기의 시기, 언론계는 한바탕 떠들썩했었다. 바로 세월호 사고였다. 그 당시, 언론인들이 시위하거나 권고사직 당하기도 하는 등 어수선한 시기가 이어졌다. 나는 그 시기가 끝난 직후 막내작가로 활동했다. 지역 방송국이다 보니 작가를 구하는 일이 더 어려워졌고, 나는 막내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방송 원고를 작성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메인작가님의 자료조사와 섭외를 도맡으면서, 나는 한 해양다큐멘터리의 인트로 꼭지를 담당해 별도의 원고 작성을 했다. 주말이면 촬영장을 따라다녔고, 당연히 초과수당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다 특집방송과 겹쳐, 프로그램이 결방이라도 하는 날엔, 그 코딱지만 한 25만원 주급도 입금되지 않았다. 주급 받은 돈으로 한 달 월세를 내고 나면, 그 주에는 쫄쫄 굶어야만 했다.
대학교 때 프리뷰 알바와 방송국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방송작가의 처우에 대해 종종 듣곤 했었다. 일은 힘들고, 박봉이라고 했다. 당연히 주급 25만원이 주어질 거라는 것도, 방송작가 인턴을 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중학교 시절의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작가라는 꿈을 택했다.
방송작가를 한 것을 후회합니까? 아니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방송작가 생활은 내가 처음으로 사회생활에 뛰어든 일이자,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열정페이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방송작가 생활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나는 미련이 없다. 나는 방송작가를 경험하면서 외려 PD라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직접 아이템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의 색도 칠해보는 등 좀 더 다채롭고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PD라는 리더가 되어야만 했다.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했으니, 사람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글쓰기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 냄새가 가득한 이야기를 담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이 PD라고 생각했다.
'첫 직장이 끝 직장'이라는 말이 있듯, 첫 직장이 정말 중요하다. 내가 방송작가를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PD에 대한 꿈을 품지 않았다면 현재의 내가 있었을까? 어쩌면 내가 오롯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찾아다닌 덕분이 아닐까. 현재의 나는 방송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여야만 하고, 늘 흘러야만 한다. 세상이 변해도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