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10년간의 나의 회사생활은 참으로 다이내믹했다. 첫 직장으로 경험했던 방송작가 이후에도 나는 끊임없이 이직하며 일을 했다. 코로나19 때 회사의 경영악화로 어쩔 수 없이 권고사직을 당한 것 빼고는 (이 이야기도 이 책에서 풀도록 하겠다) 거의 퇴사와 이직 사이에 간극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일했다. 권고사직을 당했던 때에 비로소 수년치 실업급여를 받았으니 말이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갑질 of 갑질을 경험했던 회사를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단연 지역 강소기업 병원에서 근무했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방송작가 때 전화 공포증에 걸려, 다음날 출근을 두려워했던 정도의 고통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나는 그 시기즈음부터 자존감이 박살 나서, 나 스스로를 괴롭게 갉아먹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방송작가를 1년 즈음 했을 무렵, 나는 PD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10 to 10 근무나 다름없는, 워라밸이 붕괴된 정도의 근무 환경이었던 데다, 월급이 100만 원도 안 되는 곳에서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있는 돈을 모을 수도 시간을 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나는 살기 위해 이직을 알아봐야만 했다. 그때 내가 찾은 곳이 '그곳', 지역 강소기업 병원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꽤나 큰 병원이었다. 나는 하루 월차를 내서 면접을 보러 갔다. 그 당시 지역에서는 방송작가를 했다고 하면 다들 알아주곤 했다. 그 병원 총무부 과장이 나에게 선뜻 '스카우트제의' 같은 걸 했다. 급여도 평사원보다 더 높게 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곧바로 그 병원 홍보팀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
내가 병원 홍보팀에서 맡은 업무는 사보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사보는 병원에 내원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고, 나이 든 어르신들이 많이 방문하는 병원인만큼 글은 더 쉽게 글자는 더 크게 만들어야 했다. 글을 쓰고 취재하는 일은 해봤지만, 나에게 '사보'란 생소한 영역이었다. 보통은 소설이나 수필집을 읽었을 뿐, 타 기관 사보나 매거진을 들여다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쇄소나 출판사에서 근무를 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병원을 돌아다니며 혼자 취재하고 글을 썼다. 분기마다 사보를 제작했어야 했는데, 80페이지 되는 분량을 오롯이 혼자 맡았다. 잡지를 구성하는 방법부터 디자인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나는, 무작정 지역 인쇄소에 찾아가 사장님께 디자인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을 했다. 워라밸을 보장받기 위해 이직을 택했던 나는, 공교롭게도 새로 이직한 곳에서 조차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내가 죽도록 미운 걸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의 사보를 최종 검수를 하는 사람은 센터장(이라 불렀지만, 실질적으론 의사였던 상사)이었다. 매일 오후 4시, 퇴근시간 무렵에 나는 센터장님께 보고드릴 사보를 프린터 했다. 80페이지를 양면으로 뽑으니 40장은 족히 되었다. 그땐 인디자인을 할 줄도 몰라, 한글파일에 엉성하게 구도를 만들어갔던 때였다. 아침 9시면, 센터장은 나의 빨간펜 선생님이 됐다. 1쪽부터 80쪽까지,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빨간펜으로 수정사항을 체크했다. 수정사항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단어를 살짝 바꾼다거나, 사진 크기를 키운다거나, 글자 폰트를 수정하는 등의 아주 작은 수정사항들. 그러나 이 수정사항들이 몇 십 개는 가뿐히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센터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개가 달하는 수정사항을 체크하고 나에게 다시 종이를 건넸다.
"내일 아침까지 수정해 와."
하지만 그때 나는 ‘퇴근시간이 임박했으니 그러지 못하겠다’ 말을 못 했다. 그 시절엔, 까라면 까야했다. 나는 곧장 인쇄소 사장님에게 달려갔다. 그때 내가 참, 사장님을 많이도 괴롭혔다. 그 수많은 수정사항을 당일날 바로 수정해야 하니, 사장님도 열일 제쳐두고 그 수정부터 먼저 했다. 6시부터 밤 10시까지였나. 그렇게 늦게까지 수정을 보고 나서야, 나는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는가? 그게 3번째 수정사항이었는지, 4번째 수정사항이었는지 가물가물해졌다. 그 수많은 페이지를 들고 센터장의 진료가 마무리되는 퇴근 무렵에 수정사항을 체크하고, 밤늦게 야근을 하고, 그 다음 날 출근해서 취재하다가 또 보고를 드리러 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아마 그날 센터장은 '잡도리'할 만한 상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십 개의 수정사항, 나는 단 하나의 수정사항을 체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서류더미를 얼굴에 맞았다. 센터장이 40장이나 되는 분량의 종이를 내 얼굴에 뿌리며 말했다.
"넌 멍청한 거야? 내가 이걸 수정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나는 그 순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지나갔다. 왜 이전에 있었던 여직원이 1년도 못 버티고 그만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마 내가 2년 차쯤 됐을 무렵이었을 테다. 그 센터장은 그 시간만 되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멍청한 거냐, 네 수준이 그 정도다, 말귀를 못 알아먹냐 등 온통 나를 깎아내리는 말만 쏟아냈다. 그래도 그동안은 잘 참았건만, 그날 서류를 얼굴에 던지며 내뱉은 그 힐난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물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에도, 나는 울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자 센터장이 한마디를 더 붙였다.
"내 앞에서 울지 마. 나는 여자가 질질 짜는 게 제일 짜증 나."
그리고 그 말에 나는 또다시 이전에 있던 여직원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 여직원은 센터장 앞에서 매일 울었다고 했다. 아, 어쩐지, 그럴만했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인사를 꾸벅하고는 그 방을 다급히 뛰쳐 나왔다. 문밖을 나서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짜증 난다는 생각도,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복합적이지만, 왠지 그냥 울고 싶었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그러자 센터장의 진료실에 있는 간호사 한 분이 나를 따라와 비타민 음료를 건네주셨다.
"희영 씨, 좀 괜찮아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지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 생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했던 '공부'
내가 그 지옥 같은 3년의 직장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언론고시에 합격해야만 한다는 집착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광적으로 언론고시에 집착했다. 야근을 하지 않는 날이라거나, 주말이면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잠을 깨우기 위해 마셨던 커피로, 욱신욱신 편두통에 시달려도 소용없었다. 제발, 이번 언론고시는 합격하게 해 주세요.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낙방에 대한 상실감도 크게 다가왔다. 센터장이 나에게 쏟아냈던 '힐난'은, 오롯이 '자책'으로 이어졌다. 내가 멍청한 거야, 내 수준이 이 정도인 거야, 나는 이 정도밖에 이해를 못 한 거야. 나는 밤마다 텅 빈 자취방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런 마음이 만들어낸 간절함으로, 나의 자취방엔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들이 있었다. 그 '조금만 더'라는 마음이 어느덧 3년이나 흘러버렸다.
이제 더는 직장 상사의 비난도, 나 자신에 대한 자책도 견딜 수가 없어졌다. 나의 이십 대 중반이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득 차 있었다.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직장과의 이별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채찍을 든 것이라고 했지만, 난 외려 그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그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하던 날, 가장 아쉬워했던 사람은 바로 그 센터장이었다. 마지막 홍보팀 회식, 센터장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나한테 미운감정이 들었던 것 다 털어버려라. 나는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3년간 나를 괴롭힌 언어들은 절대 날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롯이 한 직원을 갈아 넣어 성과를 얻기 위한 센터장의 욕심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주제작도 아닌, 담당자 혼자서 취재와 디자인을 하며 분기마다 사보를 제작한다는 것도 기가 찰 일이었다.
그곳은 내가 퇴사한 이후, 더 이상의 사보는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내가 대체불가능한 인재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채찍이 그 사람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매가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매'는 매일 쓰이면 '폭력'이 된다. 직원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당연히 따끔하게 알려주는 게 답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사보를 검토하는 사람조차 관련 전공자가 아니었다. 인쇄소 사장님과 밤늦게 야근을 같이하며, "저 때문에 야근하게 해서 죄송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오히려 기술적으로 디자인을 배웠던 순간은 그때뿐이었다.
가끔은 애증이 담긴 대상이라면, 그 사람은 뭐 하고 지낼지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할 테지만, 나는 요즘도 그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낼지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누군가를 구박하거나, 또는 자신의 성과를 위해 누군가를 갈아 넣고 있으려나.
그때 내가 그곳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직장생활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정말 그곳은 '일'보다도 '사람'때문에 힘든 곳이었으니까. 분명 그 직장에선 좋은 사람도 있었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유 없이 때리는 '매'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 어쩌면 내가 사회초년생이었기에 너무도 쉽게 휘둘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