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같은 직장생활을 버티게 해준 것들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직장 동료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어쩜 겪어본 사람마다 비슷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지. 세상의 모든 바다가 다 같은 성격이지 않듯, 어떤 사람은 동해바다처럼 깊거나 짙고, 또 어떤 사람은 서해바다처럼 탁하고 얕은 성격을 띠었다. 요즘 사회생활은 어쩐지, 서해바다처럼 탁한 기분이 든다. 오히려 도통 사람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보수적인 병의원에서 근무했던 시절의 나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때는 특유의 군대문화 같은 것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 말투가 '다나까'였을까. 나중에 도심의 다른 병의원 컨설팅 회사로 이직했을 때, 사람들은 나더러 '각이 서있는 사람', '군인 같은 사람', '다나까 말투를 쓰는 딱딱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것이 이전에 FM대로 일했던 회사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자존감이 아주 박살 나있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꼬투리를 잡혔다. 몸속의 혈액이 마르는 기분이었고, 영혼은 뒤틀렸다. 어느 중소기업이 다 그렇듯, 고충상담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저녁에 모여 술 한잔 하며 기분을 털어버려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분위기는 군대문화였지만, 대도시의 회사를 따라가야 한다며 나름 직원복지 같은 것도 있었다. 동아리모임 같은 것도 있었고, 상여금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율참여가 아닌 의무였다.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친목이 과연 친목일까. 복지를 빙자한 회식에 불과했다.
나는 오히려 그 시절 상사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아무리 유연한 환경을 조성한다고 해도, 이미 뼛속부터 만들어져 있던 문화는 바뀌기 쉽지 않았다. 나이 든 상사가 많은 회사일수록 그랬다. 상사가 아직 퇴근을 안 했으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회식자리에서 술은 필수로 마셔야만 했다. 그땐 그것이 잘된 것이라거나 그릇된 것이라는 판단 자체가 없었다. 그저 사회생활이라 하면 응당 그래야만 했다.
"남의 돈 벌어먹고 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
"남들도 다 힘들다."
내가 속상한 마음을 비출 때마다, 부모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나중에는 나는 그런 말이 돌아올 줄 알고, 어느 순간부턴간 힘들다는 투정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기댈 곳은 이런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직장 동료들밖에 없었다.
사내 따돌림을 당하는 동료부터 저승사자 같은 상사를 모시는 나까지
센터장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온 날이면, 나는 더더욱 퇴사 욕구에 불타올랐다. 멘탈은 이미 깨져서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었지만, 그때 나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빨리 벗어나는 방법은 퇴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혈된 눈으로 새벽 3시까지 공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언론고시에 합격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분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늘 조급했다.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직장 상사는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으며, 그 사이에서 자꾸만 언론고시에 낙방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나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된 것도 크게 한몫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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