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해도 구멍은 남지 / 그대로 놔두어야 구멍은 자라나지 않아 / 구멍을 메우려는 순간 그것은 구덩이가 된다.
-『촉진하는 밤』에 수록 작품 ‘내가 시인이라면’, (김소연, 문학과지성사)-
‘구멍’의 충북지방 방언이 ‘구덩이’라고 하는데 같은 말 같지는 않다. 옷이나 종이가 뚫어진 곳이 구멍이고 파낸 자리는 구덩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구멍으로는 반대편 공간이 보이고 구덩이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땅이 움푹하게 파인 곳이나 땅속을 파고들어 간 굴은 입체감이 더해져 구덩이가 된다는 생각이랄까. 구덩이는 그 안에 물체가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면 구멍은 이쪽과 저쪽을 왕래할 수 있는 공간은 있지만 무엇을 담을 수 없는 점이나 평면 느낌이다.
“구멍을 메우려는 순간 그것은 구덩이가 된다.”는 김소연 시인의 시어를 생각한다. 시인은 상처 난 구멍을 메우면서 사는 삶을 부정하는 것인가. 구멍을 자꾸 만지면 구멍이 자라난다니. 아니면, 문장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선이 문장을 부정하는 강한 긍정인가. 구멍이 구덩이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구멍은 구덩이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인가.
웅크려야만 안전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웅크림은 아무 소리 없이 망가지는 것들을 망가지기 전에 움켜쥐어야 한다는 강박의 형태인지 모른다. 세상이 참 모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또르르 어느 구덩이로 쏙, 들어가 숨고 싶다. 숨을 쉴 수 없거나 숨을 쉬고 싶지 않을 때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고 싶다. 작고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자아는 자기 일을 척척해내는 자아를 피해 그럴싸한 구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구덩이를 찾는다. 그러면 구멍투성이의 삶이, 변색한 삶이 구덩이에서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붉은 흙 위를 도장 찍듯 꾹, 꾸욱, 밟고 있는 신발들이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작품은 ‘그림 없는 미술관 프로젝트’, 복기형의 「흙만찬」이다. 흙으로 만찬을 즐기고 흥겹게 잔치하는 설치미술작가 작품에 관심이 간다. 작품에 집중할수록 작가가 추구하는 철학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흙을 밟고 다니며 노동하는 삶과 힘겨운 노동일지라도 노동하는 발걸음으로 땅을 일구는 일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신발에 집중한다.
흔하디 흔한 물건 중에서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전시한 작가는 신발을 신고 살아가는 인간의 내밀한 삶을 이야기한다. 흙이 왕창 묻은 비닐장화, 가죽구두, 헝겊 운동화는 새 신발이 아니다. 낡은 신발은 고된 노동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진실하고 곡진한 삶을 대변한다. 흙을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흙 묻은 신발은 우리가 매일 노동하는 삶의 은유다. 땅을 딛고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신발이 흙과 잔치를 벌인다. 흙만찬에 신발을 초대한다는 것은 그 신발을 신은 사람을 축하하는 일이다. 누구의 신발일까. 얼마 동안 신었던 신발이며 어떤 일을 하며 어디를 다녔던 신발일까. 낡고 낡은 신발 바닥에 굳건하게 붙어있는 흙은 그 누구도 천대할 수 없는 길고 긴 삶의 꼬리다.
노동과 예술은 서로 기대어 소리 없이 서로를 부른다. 움직일 수 없는 신발들이 세상을 응시하는 것 같다. 신발이 어떻게 세상을 볼 수 있겠냐마는, 미래를 등질 수 없는 운명처럼, 누군가의 발이 빠져나간 신발에서 신발 주인의 눈동자나 목소리가 운명공동체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 생각난다. 하이데거는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작품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신발의 어둡고도 내밀한 공동(空洞)에는 고된 노동의 피곤한 발자취가 배어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느리고도 완강한 발자국이 투박하고 견고한 이 무거운 구두 안에 단단히 새겨져 있다’라고.
누구나 인생이라는 들판을 지나가지만, 빠르게 변하는 삶에서 힘이 부족하고 능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신발이라는 동굴에 발을 디밀어 이 땅에 투박하고 단단한 삶을 새기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이 자신을 증명하는 이력서(履歷書)다. 신발(履)이 끌고 다닌 역사(歷)의 기록(書)(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가장 수고롭고 안쓰러운 일상을 감당하는 하는 것이 신발이며 거칠고 지저분한 땅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를 지탱해 주는 것이 신발이다.
누구에게나 내밀한 생이 존재하기에 텅 빈 지하에서 울리는 공명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어둠을 뚫고 촘촘한 느낌을 찾는다. 유배당한 삶일지라도, 싫은 소리를 낭자하게 듣는 삶일지라도, 비위를 맞추기 바쁜 삶일지라도, 어두운 구덩이를 맴도는 맑은 소리를 찾는다. 좋은 뜻으로 했던 말을 생각하고 고깝게 들었던 말의 진의를 생각하면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는 미동에 귀 기울인다.
고흐의 ‘고된 노동의 피곤한 발자취’가 배어있는 「구두」 작품이 탄생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신다가 벗어놓은 낡은 구두는 그 구두를 신었던 이의 삶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새 구두를 산 다음에 일부러 흙으로 문지르고 주물러 낡은 구두로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흙이 묻어 있지 않는 구두는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며 삶을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 고흐는 낡은 구두가 생의 정면과 이면, 속과 겉을 포함한 버석거리는 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삶의 철학이 신발의 깊숙한 공간처럼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신발이라는 검은 동굴 속에 있는 발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생의 역동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구멍투성이의 인생이 염치를 알고 예의를 구별하기 위해 움푹 파인 공간에서 보편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종일 발을 품었던 신발을, 삶을 해석한 신발을 암흑처럼 어두운 구덩이로 남겨두려는 사람들. 어둡고 내밀한 공동(空洞)에 내일을 남겨두고 쉬려는 사람들. 그다음 노동을 위해 일종의 안락함을 가슴에 안고 밤을 보내려는 사람들. 그들은 흙은 거칠지만 부드럽고, 먼지 나고 질척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단단해지는 흙의 본성, 생의 본질을 알고 있다.
어떤 정의나 범주가 정확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원색적 반응이 시대를 증명한다. 흙의 거침과 부드러움으로 형성한 신실한 삶을 말하고 들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흙이 계급론에 희생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가난의 대물림이나 가난의 상징이 왜 흙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사회는 자본의 실체를 잘 모르면서 사용하게 된 낱말이 흙에 대한 정의가 되어버렸다. 이 이상한 시대적 흐름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흙에서 생산되는 고된 노동의 가치를 언제부터 내동댕이치게 됐는지 생각해 보니 마치 풍문으로 알게 된 말이 사실로 둔갑한 것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포장도로에 길든 삶을 살면서 흙에 대한 예찬은 아니더라도 흙의 정직성을 깎아내릴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무얼 해도 구멍은 남는다. 구멍을 메우며 사는 삶도, 구멍을 그대로 놔두고 사는 삶도 괜찮다. 흙 묻은 낡은 신발은 어둡지만 내밀하고 정직한 삶이다. 노동의 피곤한 발자취가 배어있는 공동(空洞)이 편안하다면, 투박하고 견고한 삶이 공동에 단단히 새겨져 있음이 틀림없다. 무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