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노숙자를 보면서 생각해. 나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것인지. 비록 조그마한 집이지만,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이렇게 나를 위로하면서 살아가게 되네.”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는 지인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한 말이다. 지인의 말을 들으면서 인생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이야기가 좋은 드라마 소재라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올랐고, 하루라도 잘 살아가자, 라는 노랫말이 생각났다.
어른들이 ‘위를 보고 사는 것보다 아래를 보면서 살아야 행복하다’라고 하는 말이 진리인 줄 알았다. 사회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말을 듣다 보면, 누군가와 자꾸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게 되는 데,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님에도 한숨과 넋두리를 섞으면서 아래를 보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래를 보고 살지 않아서 힘들게 사는 것인가를 의심하다가, 아래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위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종의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덕담인데, “정말 그럴까?” 싶었다.
남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나은 것을 찾게 되면, 비록 내 삶이 어렵지만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안도감으로 위로를 불러오곤 했다. 그런데 자글거리는 현실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사건과 사고에 혀를 차면서도, 나름대로 삶을 잘 경영하고 있다는 최루성 자족 이론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으로만 사는 것이 삶이라면 불행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보다는 다른 사유가 필요한 시대정신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딸각거렸다.
엄기호의 『단속 사회』(창비, 2014)는 ‘아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문장에 깔린 석연치 않은 기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위’와 ‘아래’라는 낱말에서 오는 불편한 서열과 누군가를 연민으로 바라본다는 오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타자와 자기를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는 변종된 우월감이고, 타자를 불쌍한 사람으로 몰아간 빈자리에 자족하는 삶으로 변환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잘못된 나르시시즘에서 오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어느 서열에 속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황량한 삶일 뿐, 금방 마음에서 지워지고 없어질 연기 같은 것이라고.
한나 아렌트는‘평등이란 공동의 세계에서 동등한 파트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공동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동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에 누군가를 비교 대상으로 만들어 삶과 삶을 위아래로 나뉜다는 것은 거짓된 안도감과 허황한 감사라는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과 책을 읽고, 책과 놀고, 책으로 생각 나누는 독서지도사였다. 어느 날, 『종이밥』(김중미, 낮은산)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고는 신축 고층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로 건너편 달동네에 갔다. “자 봐라. 여기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그것도 이 좁은 집에 여럿이. 너희들은 얼마나 편한 곳에서 살고 있니. 이곳에 사는 아이들보다는 너희들은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으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이 “선생님,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어요?”라고 물어볼 것만 같다.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니 사실, 들려줄 대답이 궁색하다. 그때는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말이 참으로 경박하고 즉흥적인 이야기였음을, 위선이나 다름없는 만행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가난과 왕따 문제다. 『종이밥』동화책도 조부모와 남매가 함께 사는 가난한 가족 이야기다. 시장에서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을 파는 할아버지와 병원 청소부인 할머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철이와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송이. 송이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집을 나간 후, 송이는 종이를 씹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철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열쇠를 따고 방문을 열 때까지, 송이는 단칸방에서 혼자 놀았다. ……, 송이는 배고플 때,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종이를 먹었다.”(동화책 내용 참조)는 문장에서 왜 책 제목이 종이밥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가난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슬프지 않다. 송이 가족을 불쌍한 이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송이네 식구는 누군가의 연민이나 사회적 약자로 바라보는 거드름보다 서로를 평등한 파트너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요구한다. 송이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가난한 사람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 것이며, 세상의 모든 어려운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들을 향한 연민 따위는 버려주었으면 한다. 특히나 조부모와 살고 있는 송이와 철이는 그렇게 슬프지 않으며, 부모가 없는 가정이지만 오히려 무한경쟁으로 만성 초조함을 늘 달고 다니는 중산층의 어느 가정과 다른 소박한 안온함으로 일상을 만들어 간다. 송이네 가족을 긍휼로 여길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이 글을 쓰면서 고백하건대, 세상은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이고, 운신할 곳이 마땅치 않고, 정신적 교신이 끊어지고, 몽매하고 갑갑하다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든다. 누구보다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을 찾느냐고 분주한 나날이고, 우월성을 찾아 부풀려진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나날이다. 그러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쓸쓸함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 얄캉한 감상이 파고들 때는 허영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다.
이처럼 연민에 의한 허영은 자기부터 생각하는 것이며 언제 터질지 모를 풍선처럼 가볍다. 이제는 익숙하다고 느끼는 생각에 새롭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생각으로 확장하려고 애쓰는 일이 남았다. 고착된 생각이 유연해지고 유연함이 연속적으로 편견을 깨트리며, 깨진 편견이 또 다른 의견으로 사회화할 때, 생각은 생각을 기다리게 된다. 편견을 의견이라고 우기지 않으려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신에 대한 배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경청해 봄 직하다.
세상의 모든 소수자의 삶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을 가지는 것보다 평등한 사람이 가진 권리를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이지 싶다. 사람 살아가는 특성은 위아래가 없으며 익숙하지 않거나 모르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삶이 우리를 활발하게 한다.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이라는 낱말에서 한쪽을 치우친 생각보다 대상 전체를 생각하는 더듬이가 작동한다면 불평등에서 오는 틈을 자기의 나르시시즘으로 메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완벽함이라는 게 오히려 따분할 수 있듯이 불완전한 모습에서,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삶을 상상하는 일이 오히려 덜 따분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