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들린다. 거리, 공원, 음식점, 카페, 마트, 버스 등등 어디를 가나 음악이다. 음악을 듣는 것이 이렇게 고역인 줄 몰랐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음악이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TV가 없고 라디오가 없고 음악이 없는 공간을 찾게 된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사람을 소음 주체로 인식하는 문화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공간을 채우는 사람 말소리에는 리듬이 있다. 다른 이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이 음악을 듣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떠드는 이들을 환영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 말소리를 죽이기 위해 음악을 살리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계에서 나오는 음악은 무차별 난사하는 총소리 같다.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음악을 누군가는 싫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음악이 사람 목소리를 흡수한다는 생각 자체가 폭력이다. 눈꺼풀이 내려오면 앞을 볼 수 없듯이 귀꺼풀이라도 있으면 음악을 듣지 않으련만, 귀마개로 어림도 없다. 차단할 방법이 참으로 궁핍하다. 음악은 생각보다 멀리, 높이, 빠르게 퍼지며 음악의 존엄을 상실한다.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음악이 환경을 방해하는 순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다. 음악이 커질수록 짜증이 나고 신경 줄이 엉킨다.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다르기에 존중해야 하는 것이 음악이 아닐까. 존엄이 사라진 음악은 유배되었던 시간을 소환하거나, 자기 맥박에서 스르르 풀리는 자아를 만나거나, 갑자기 마주한 빛으로 인한 현기증으로 형상화된 풍경을 떠올릴 수 없다. 그저 소음일 뿐이다.
예술의 대중성과 다양성, 시대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중, 음악은 상당히 포괄적이다. 더구나 마음 밑바닥에 무늬를 이루던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고통으로 통제력을 잃을 때도, 촉촉한 감수성이 딱딱하고 오돌토돌한 종기처럼 변이를 일으킬 때도, 메말랐던 감성이 걷잡을 수 없는 피곤으로 질식할 때도 음악은 유일한 방비처럼 마음을 단속하게 한다. 음악이라는 방패와 창으로 견뎌내는 시간은 피로한 삶을 위로한다. 음악은 환상이었을지 모를 그 무엇을 진단하거나 구속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발견하고, 보고, 말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한다. 피로한 삶 때문에 어른거리는 환상일지라도 음악은 결핍이 드러나는 삶을 감수성으로 치환한다. 최루성을 동반한 감수성일지라도 삶을 견디는 눈물이 된다.
약해진 삶이 보일 때, 맥이 풀린 삶을 느낄 때, 반쯤 열린 증오의 눈길에서 꼬리 달린 악이 보일 때, 아는 얼굴에서 노쇠한 문장을 읽었을 때, 같은 형편이 아닌 타인에게서 격리된 느낌이 밀려올 때, 울고불고 난리 치는 드라마를 보며 비웃음 비슷한 웃음이 나올 때, 사람이 죽어가는 뉴스를 보고도 마음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때, 대답을 피하고 싶은 질문을 받았을 때, 음악이 없었다면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마음을 어찌했을까.
그런데 변화하는 세월 따라 음악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음악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시끄럽다. 음악이 소음으로 들리는 것은 음악을 대하는 사람 때문이지 음악 때문이 아니다. 눈 녹는 소리 같은, 습기 찬 바람이 조용히 말라가는 소리 같은, 물속에 뿌리를 둔 나무의 찰랑이는 소리 같은 음악이 사라져서 안타깝다. 궁금한 대답을 기다리며 숨어 있는 빛을 찾는 마음 같은 것을 느끼기 힘들다. 불을 끄고 방에 누워서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묘한 빛으로 설레는 마음을 나누기 어렵다. 그 빛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축축한 시간을 매만지는 무해함을 누릴 수 없다. 예전처럼 산산이 부서진 생각 무늬들을 불러올 수가 없어 서럽고 외롭다.
공원에서도 산에서도 들에서도 음악이 들린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음악 들어야 한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숨이 끊어질 듯 절실한 사랑과 이별의 발라드를 들어야 한다. 지하철에서 공간을 압도할 만큼 큰 전화벨 소리로 트로트를 들어야 한다. 프랜차이즈베이커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K-POP을 들어야 한다. 최근 리모델링한 목욕탕 안에서도 TV를 볼 수 있다. 탈의실에서도 혼자 떠들고 있는 TV. 소리를 줄이면 어느새 소리가 커져있다. 이 시대에 버튼만 누르면 음악을 틀 수 있는 편리함이, 상업적으로 풍요한 문명이, 선망이나 갈망에 길들어버린 고통쯤은 당연하게 여긴다. 이미 문명을 잠식한 음악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장소나 공간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침묵이나 조용한 목소리는 유령 취급이다. 음악이 점점 험해진다. 격투를 닮아가는 음악 때문에 새도 놀라고 나무도 놀라고 물도 놀라고 공기도 놀란다. 조용함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을 상상하게 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계절을 기다리게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음악으로 소원하고 바라는 일이 중단된다. 거친 음악이 아득한 그리움을 방해한다면, 음악은 이미 이기적 방해꾼이 아닐까. 오명이라고 항변해도 어쩔 수 없다.
눈을 감게 하고 긴밀한 기억을 즐기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음악이 얼마나 많은가. 만족스러운 삶에 핵심이 되는 고요와 협주하는 음악은 어디로 갔는가. 개인 문화마저 침해하는 음악은 이미 음악이 아니라 그저 소음일 뿐이다. 박자와 가락, 목소리와 악기 조합으로 감정을 나타내는 음악이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면, 소박한 공허를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면, 숨겨진 빛을 찾는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면, 타인의 감성을 해석할 수 없다면 그저 광기이며 멸시다.
“그 생애도 내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을 테니, 내가 음악이 되어 너를 깨우리라.”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피코 델라 미란돌라, 경세원, 2009)에 나오는 문장이다. 음악은 다음 생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어쩌면 잠자고 있는 감성을 깨우는 일이다. 돌아오지 않는 시절 대신에 남아있는 사랑 같은 것. 인간은 자기 본성을 자유의지에 의해 인간관을 결정한다. 또한 타인에 대한 존엄을 배제하지 않는다. 존엄에서 시작하고 존엄으로 마무리하는 자유의지에 타인에 대한 존엄이 포함되어 있다. 음악은 숨길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세계에서 타인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다. 타인을 지배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래야 함께 하는 삶이 가능하다니까.
일찍이 음악으로 스며든 바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음악은 유적지를 남기지 않지만 어는 먼 나라에서는 음악이 방금 다녀간 나라들을 허공이라고 부른다.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김경주 시, 문학과지성 시인선 R04)
음악이 우리 생을 미행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라면, 음악은 우리 생을 존엄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