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공간

by 남쪽맑은물


그녀는 의자를 좋아한다. 그녀에게 욕심이 있다면 의자에 대한 소유욕이다. 의자를 보면 앉아보고 만져보고 이리저리 살피는데, 그때, 의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과 손은 예술이다. 그녀의 손이 닿으면 재활용품도 골동품이 된다. 때에 따라서 생각보다 비싼 값을 치를 때도 있다. 의자의 재질과 촉감, 편안함과 아름다움에 가치를 두지만, 공간을 만들어가는 다양성에도 가치를 둔다. 물론 다른 사물과 어울리는 감각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그녀가 모양과 크기가 다른 의자 세 개를 내게 주었다. 이유는 책만 덩그러니 있는 방에 의자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에서다. 집에 있는 의자 한 개를 보태 원탁과 함께 배치하니, 마치 생명체 같다. 각자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 빈 의자에 쉬고 있는 생명체, 다시 빈 곳으로 남겨두고 떠날 생명체 말이다. 전혀 관계가 없던 물건이 모여서 공간을 형성한다. 책과 책이 다닥다닥 붙어 있게 된 인연도 기가 막히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존재하게 된 의자의 인연도 감동이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살아있는 것 같다. 빈 의자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환청이나 환각이 아닌 상상이 가능한 공간임이 틀림없다.

방에 자리를 잡은 의자는 종종 재미를 준다. 그날의 생각과 기분에 따라 앉을 의자를 정하는 일이 꽤 즐겁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누군가가 채워주며 관계를 형성해 가는 일이 생명체가 아니면 할 수 없기에 그렇다. 생명체에 의해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관계는 어디에서든 일어난다. 방에서도, 거리에서도, 옥상에서도, 버스에서도, 즐겁고 자연스러운 일이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진다.

동양 문화 가치인 ‘관계’와 ‘비움’이라는 뜻에서 공간이라는 낱말이 유래되었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을유문화사 / 2015)

그렇다면 ‘공간’은 ‘비움’과 ‘관계’의 합성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공간이라는 것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 즉, 비어 있다는 뜻 ‘공(空)’과 사이라는 뜻 ‘간(間)’은 함께 할 운명이다. 그렇게 조합한 공간이 갖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매일 앉는 의자에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의자는 우리에게 비움과 채움의 관계를 이어가게 하는 철학이 예술 가치로 다가온다.

언젠가, 그녀와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으로 전시된 의자를 본 적 있다. 시대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디자인,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재질, 문화 정보에 따라 달라지는 쓰임새, 사람 의식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을 ‘의자’라는 사물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의자를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누가 앉을지 모를 의자를 만든 사람의 손가락 느낌이 무척 궁금했지만, 꼭 만지지 않아도 왠지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자를 만든다는 것은 무한한 공간에서 또 하나의 공간을 형성해 나가는 것, 그것은 내일을 향한 시선이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작은 공간이라 해도 예술가 손끝이 향하는 곳을 모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등받이가 있고 없음, 팔걸이가 있고 없음, 광택이 있고 없음, 곡선과 직선의 조화, 높고 낮음, 넓고 좁음, 움직임과 고정 등등. 의자는 다양한 생명체만큼이나 개성이 무궁무진하다. 관계를 형성해 가는 사람들 일상처럼 의자는 늘 가까이에 있다. 밥 먹고 차 마실 때, 책을 보거나 멍하니 있을 때, 누구를 그리워하거나 기다릴 때, 사랑하고 미워하며 울고 웃을 때, 추억을 불러내고 그 추억을 잊기 위해 애쓸 때, 의자는 동반자가 된다. 버스 정거장이나 공원, 유적지나 심지어 골목에서 의자를 만난다. 우리는 그 공간을 채우고 비우며 살아간다. 누구를 위해 그 자리를 비우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그곳을 채울 내일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우주의 한 생명체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의자는 우주 공간이다. 생각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의자는 개인의 삶을 지극히 인간다운 삶으로 만들어 주곤 한다. 같은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기존 관념이 바뀌기도 하니 역시 의자는 세상 관계를 형성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렇게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고 과거를 회상한다. 의자는 사소한 일에서 의미를 찾고 복잡한 일은 간단하게 압축하는, 상상력과 추상력의 저장 장소다. 내일로 향하는 헌걸찬 의식이 일어나는 공간에는 개별성이 있다. 그 개별이 지닌 특별함은 자잘하면서도 중요한 온갖 것들과 역동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미국)가 살았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의자 세 개가 있었다. 친구가 찾아오거나 나그네가 오면 의자를 내놓았다. 나그네 여러 명이 왔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의자를 대신할 나무 둥치에 걸터앉거나 땅바닥이나 풀밭에 함께 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도 의자 두 개는 항상 비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둑신한 나무 그림자와 호수 위에 떠 있는 새벽별과 고독을 즐기는 소로의 또 다른 자아가 앉아 있었을지 모르니까. 어느 작가의 문장처럼, “혼자 있는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의자는 은유로 가득한 고독한 심장을 뛰게 하면서 환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내일은 나, 오늘은 너.”


의자는 공간에 공간을 형성하며 기다린다. 어쩌면 의자는 기다리는 상태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이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신호이기에 그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앉아서 채움이 되는 지금과 누군가가 떠나서 비움이 되는 지금이 연결되는 판타지가 의자 예술이다. 아무리 멋진 예술로 디자인한 의자라도 채워지는 즐거움이 없다면 비워지는 기대감도 없을 것이다.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어두운 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마음으로 생각이 빙빙 돌 때 내일이라는 미래가 두려워 잠이 달아날 때가 있다. 그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는다. 그것은 우주가 움직이는 느낌, 그 공간에서 유영하며 어딘가에 안착할 거라는 기대감으로 표류하는 느낌이다. 미세한 공기처럼 침묵이 다가오는 느낌이며 그 침묵은 내일을 향한 속삭임이다. 그러다 다른 빈 의자가 눈에 들어오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삶을 생각하다가 가끔 외로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내일로 향하는 의식이기에, 흐르는 눈물이 멈출 때까지 기다린다. 세계지도에 없는 내일 지도를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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