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가위도 고칠 수 있어요?”
“가져오세요. 장담은 못 하지만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아저씨는 ‘칼 갈아드려요’ 플래카드를 트럭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이미 편백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은 전시되어 있었다. 매끄럽게 손질한 주걱, 뒤지게, 냄비 받침, 숟가락, 젓가락 여러 종류의 도마, 발 지압기 등을 가지런하게 판매대에 진열했다. 나름대로 질서 있게 햇빛을 받고 있는 상품은 주절거렸던 말이 제자리로 돌아와 침묵하며 다음을 기다리는 의식 같았다.
그녀가 가위를 가지고 왔을 때, 아저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위를 자세히 보았다. 한쪽 눈을 감고 이리저리 가위 상태를 보기도 하고 오른손으로 엿장수처럼 찰강찰강, 가위질하더니 가위 고치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말로 펜치로 나사를 조금 돌리니 이가 잘 맞았다. 역시 일본 제품은 좋다면서 혹시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토요일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에 장이 선다.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가 아니라 규모가 작다. 야채나 과일, 생선 정도가 전부다. 가끔 LED등이나 금을 사고파는 상인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판매가 신통치 않으니 매주 보기는 힘들다. 그중 편백나무 아저씨도 가끔 온다. 칼 가는 것과 편백나무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칼을 갈고 도마 등속을 만드는 것을 보니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얼마예요?”
“그냥 가져가세요. 제가 한 게 없어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 여기를 보세요. 이 나사를 아까 내가 한 것처럼 펜치로 조금 돌리면 돼요. 이 가위는 정말 좋은 가위예요. 이것 보세요. 나사가 양쪽으로 있잖아요? 그래서 나사 돌리기도 아주 쉬워요.”
아저씨는 상품을 다시 정돈하면서 연신 좋은 가위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진열된 작은 도마와 젓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안 사셔도 돼요. 제가 돈 안 받았다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살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작은 도마가 예뻐서 사려고 한다고 하니, 아저씨는 웃으며 안 그래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도마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도 집으로 왔다.
그녀는 도마를 사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도마를 생각하니 편백나무가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아른대는 편백나무는 지난봄 대마도 신사 앞에서부터 도열해 있는 편백나무 숲길을 생각나게 했다. 편백나무는 평범하고 조용했다. 아주 키가 큰 나무지만, 어떤 위협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리려 온화하고 부드러움마저 느껴져 거대한 나무가 지닌 위엄 속에 깃든 휴식을 생각했다. 침엽수로 울창한 숲에서는 종종 사계절을 잊곤한다. 숲을 나와야 숲이 보인다지만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넓은 숲길에서 길을 잃지는 않았고 꼭 숲을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몇백 년이 된 나무 사이로 난 숲길에 서서 감탄했고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은 무엇일지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조각조각 나누어진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던 날, 그 길을 걸으며 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삶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신이라는 낱말이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나무가 신앙 같다고, 숲의 정령은 하늘과 사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선물 같은 생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신성한 솟대 같다고, 잎에서 뿌리로 전해지는 무구한 세월의 변함과 변함없음이 어떤 사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신앙(그녀는 교회를 다녔다)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을 때, 유일신을 바라보는 신실한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나무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일상의 평화와 평안을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시시때때로 신을 찾았고 신에게 기도했지만 어느 순간, 이 모든 행위에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의 존재를 믿을수록 마음의 평화와 평안보다는 두려움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가. 저렇게 하면 안 되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지 않으면’이라는 부정을 전제로 하는 가설들이 와락 달려들어 겁이 났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다 두려움이 점점 더 그녀의 마음을 잠식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통증도 통증으로 느낄 수 없는 순간을, 숨이 끝나는 순간을, 냄새와 냄새가 뒤섞인 악취를 느낄 수 없는 무감을 상상하다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토악질을 해댔다. 그러다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일상을 서성이다가 마주친 숲에서 나무에 깃든 그 무엇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숲에서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신이 유일하지 않다는 논리를 하나 둘, 따져보았다. 그녀가 만난 나무들이 모두 신과 같은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뚝하게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린 나무에 기대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세월을 숨이 넘어갈 때까지 살아가는 생명을 생각했다. 숲에서 느끼는 정제된 정신세계란 무엇인지, 마음속에서 자잘하게 분해된 배설물 같은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신앙이 집착과 다른 것은 무엇인지 그 이유를 따지기 시작했다. 아, 누군가가 믿고 있는 신도 그녀가 믿고 있는 신도 하나가 될 수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숲을 이루는 나무도 제각각의 생각을 뿜어 내는 것이 나무의 향이며 나뭇잎의 흔들림이며 나무뿌리의 방향이라는 생각이.
숲에 있으니 어디선가 선의가 뿜어져 나오고, 웃음이 들리고, 악의가 갈피를 못 잡아 억울해하는 분통이 들리고, 믿음과 배반으로 뒤엉키어 점점 꺼져가는 한숨이 느껴지고, 억울한 울음과 함께 땅을 치며 원통해하는 악다구니가 들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괴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공기의 흐름처럼 바람 같은 정령들의 잠꼬대가 들리는 것 같았고 생명이 생명을 건너가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한 생명의 고귀성은 절대로 오리무중일 수 없다는 또 다른 진실을 향한 잠꼬대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평화와 평안을 위해 존재하는 신, 그 신을 섬기며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는 존귀한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한 늠름한 편백나무의 건강함은 그들이 바라던 건강함이었다. 어떤 신이 우리를 억압할 것인가. 진정한 신은 우리의 불안을 담보로 무언가를 모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 신으로서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사람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역설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몇 주일 지난 어느 장날에 나무를 연마하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무엇을 만드는지 궁금해서 다가갔더니, 귀에 익은 Kansas의 ‘Dust in the wind’ 노래가 들렸다. 흩날리는 먼지처럼 결국 우리는 사라질 뿐(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이라며 혼자 듣기에 맞춤한 음량으로 장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소음을 흡수하고 있었다. 음악에 귀 기울이니 두둥실 바람에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연마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아저씨가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칼 갈아드려요’ 플래카드도 바람 따라 음악 따라 어디론가 가버릴 것처럼 곁눈질하듯 흐느적댔다.
사지 않아서 후회했던 시집 크기만 한 편백나무 도마 다섯 개를 샀다.
“똑같은 도마를 무엇에 쓰려고 다섯 개나 사나요?”
“그림 그리려고요.”
“그림이요? 도마에 그림이라. 흥미로운데요. 그림이 완성되면 보여주실래요? 궁금하네요. 제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이 아파트 장터에 오거든요.”
“…, …”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후배에게 도마를 주면서 도마에 숲의 정령을 그려달라는 부탁했다. 나무와 동고동락하는 바람은 물론 잠꼬대하는 정령의 마음을 표현해 달라고 말이다. 그녀의 후배는 도마 앞뒤를 자세히 보더니, 편백나무 결이 바람이네요, 라며 어려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고 언제까지 그려야 하느냐는 질문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나무에 정령을 그리는 일은 가위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잘라내거나 필요할 만큼 오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시간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령이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환영을 나타내는 것이고 죽음은 숲이 되어 몸 전체로 설명할 수 없는 결핍을 드러낼 것이니까.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