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by 남쪽맑은물

그녀는 어렸을 때 말이 참 빨랐다.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그런 말투가 싸움에서 이기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말의 속도감과 더불어 더듬거리지 않고 말하고 나면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있었다. 굴곡 없이 하는 말, 침 삼킴이 방해되지 않으면서도 화가 난 이유와 억울한 사연을 다 말했다는 생각이 들면 싸움에서 이긴 것 같았다. 특히 어른에게 이유 없이 혼났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속으로 조목조목 반박할 말을 정리하곤 했다. 어린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따박따박 대들어, 매를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는데, 라며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반발심이 우글우글했다. 인자하고 다정한 어른보다는 야단치고 화를 내는 어른이 훨씬 많았다는 기억이 유독 그녀에게만 있는 것인지 궁금하긴 하다.

사실은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용기 내어야 할 때는 무척 떨렸고 무서웠으며 말을 더듬었다. 말하다가 눈가에 모이기 시작하는 눈물 닦기를 여러 번. 그럼에도 아닌 척하려는 안간힘이 애처로웠다. 드디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듯, 해야 할 말이 무의미해지는 낭패감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스르르 자리를 뜨거나 어딘가에 숨어서 멈추지 않는 눈물을 계속 흐르게 놔두는 방법밖에는.

싸움, 눈물, 참패, 길고도 긴 침묵 그리고 허망함으로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았고 부끄러움만 되살아날 때 두고두고 울면서 후회할 때도 있었다. 우느라고 할 말을 다 못했다는 후회로 그녀 마음을 기만하고 처참하게 만들던 상황을 역순으로 생각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눈물은 말랐지만, 마음에 남은 눈물에 질척해진 억울함은 그날들과 함께 목울대에 남아있곤 했다. 지금은 우습기도 하고 아련한 추억담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녀가 언제부터 화가 나거나 억울할 때 울지 않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되면서 그런 거 같은데 아무튼, 자기를 보호하는 힘이 약한 어린이의 안간힘이,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는 그 당시 상황들이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그녀는 언제부터 달라졌을까. 언제부터 싸움이 엄청난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지, 그래서 폭발하는 감정을 자제하려고 애쓰게 된 것일까. 싸울 일이 점점 줄어들거나 화가 나거나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지 않아서가 아니다. 가족이랑 싸우고 울고, 친구랑 싸우고 울고, 애인이랑 싸우고 울고, 또 누구랑 싸우고 울고, 설명하기 어려운 대상과 싸우고 울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그러면서 긴 침묵에 자신을 가두고 허물어진 자존감이 다시 쌓여가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화를 내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화내는 일이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화가 나지만, 화풀이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을 화로 다스릴 수 없고 꼭 화를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실망이 화풀이할 다른 방법을 찾던 중, 그녀는 글 쓰는 방법을 택했다.

자존감을 잃어버린 순간과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순간 사이의 긴 시간, 그 어마어마한 시간에서 얻어낸 어떤 결과물 중 하나가 글이 아닐지 생각한다. 화를 극복하는 방법처럼 중요한 것은 화를 내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움베르트 에코가 말한 것처럼,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패러디하는 것이 글일 것이다. 무능력하고 어리석음이 인류의 천부적인 소질이라는 에코의 의견이 자학적인 그녀의 상황을 푸념일지언정 쓸쓸한 시간을 견디게 해주니까.

그녀는 회복하려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울면서 후회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울면서 후회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화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세상에서 부조리한 사람들이 하는 말, 더구나 설득하려는 의지가 굳건해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을 듣게 되면 화가 난다. 사실을 왜곡하고 악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악을 퍼트리겠다는 의도가 담긴 말이, 꿈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언하는 입술이,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웃음이 화내는 방법에 대해 영감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2016, 켄 로치 감독, 70회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에서 다니엘은 화가 난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다니엘은 어떻게 화를 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다니엘은 심장병으로 목수 일을 더 할 수가 없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애쓰는 노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다니엘에게는 너무 까다롭다. 권위주의에 길든 공무원의 태도와 유연성이 떨어지는 행정업무와 연속성이 부족한 복지 시스템이 생활 약자인 다니엘에게 실용적이기에는 매우 버겁다. 나이 들고 병든 실업자는 이 세상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느낌이 그저 느낌만이 아닌 사실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체감한다. 사회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다니엘은 화가 나지만 화를 참는다. 화를 내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랫동안 사회 약자로 살아오면서 터득한 것이기에.

그러나 다니엘은 공권력의 냉랭한 태도에 맞서기 위해 그만의 방법을 선택한다. 무능한 실업자지만 마음 따뜻하고 재주 많은 그는 담벼락에 이렇게 쓴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러기에 내 권리를 요구한다.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브레이크다’

다니엘은 화가 나지만 화를 내는 것보다 더 힘이 있는 방법, 바로 자기 생각을 글과 말로 자존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화를 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다니엘과 같은 마음이다. 빠른 말보다 정직한 말이, 많은 말보다 자존감 있는 말이 화를 내는 것보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훨씬 힘이 된다는 믿음이 있다. 이 세상에 다니엘이 했던 생각과 말에 그녀도 무언가를 보태고 싶지만 그럴 말이 부족하다. 다니엘의 글에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을까.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니엘 생각에 그녀가 동참하는 것만이 우아한 연대가 아니면 무엇일까.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았고 동등하게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선에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평등한 세상에서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에 감정의 소모나 시간의 실효성을 따지기에는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고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 예술적이거나 철학적인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개인의 용기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영역이다.

다니엘은 담벼락에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난 후, 어떤 열패감으로 눈물이 나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밥이 목울대를 툭툭 건드린대도 울면서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 말을 했고 그 말이 존재감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보았기에….

그녀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자기 약속을 지키는 행위에서 고요한 힘을 느낀다. 자존을 지키는 일에는 분명히 부끄러움을 넘어 신통하고 묘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의심 속에서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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