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by 남쪽맑은물

지붕 색상이 희미해졌다. 물들인 색이 볕에 바래듯, 밝음도 삭아내리듯, 세월의 흔적이 몽글몽글 지붕에도 있다. 초봄을 맞이하는 마을은 겨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추위에 사람 손길을 기다리는 정원과 빛바랜 귤색 지붕이 마을을 감싼 겨울 숲과 비슷하다. 마을에 모여 있는 육십여 채의 지붕이 바삭바삭한 해를 받으며 겨울 꽁무니를 거두어들일 준비를 한다.

이 숲 속 마을에는 책방이 있다. 어디선가 부는 봄바람이 제법 차지만 봄기운이 살금살금 마을 주위를 맴돈다. 흐릿한 공기조차 예전의 선명했던 기억을 훼방 논다. 몇 년 전이었나. 그때 일이 흐릿한데도 여전히 숲 속 책방이 그 자리에 있어 반갑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내 발걸음을 반긴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책방이 여전히 숲 기운을 내뿜고 있다. 숲의 환대를 누리는 기쁨이 사유를 불러온다.

나는 숲 속을 산책했습니다. 낮잠을 자는 커다란 사자를 깨워 같이 걸었습니다. 목욕하며 물장난하고 있는 아기 코끼리들도 나를 따라나섰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잼을 먹고 있는 커다란 곰이 “기다려, 같이 가!” 소리쳤습니다. 나무 사이에서 깡충 뛰기를 하던 캥거루 가족이 북을 들고 뛰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새가 일어나 따라 걸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있던 작은 원숭이 두 마리가 “행진이야, 행진! 우리는 행진을 좋아해!”라며 나들이옷을 입고 따라나섰습니다. 풀 뒤에 있는 토끼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습니다.
함께 숨바꼭질하며 놀았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가 되자 나는 숲 속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줘. 그때 같이 산책하자”

-『숲 속에서』 마리 홀 에츠 그림/글, 시공주니어-

숲 속에 가면 산책하는 즐거움이 있다. 즐거움은 이야기를 만든다. 숲에서 탄생한 이야기를 나무에 새긴다. 숲에 가면 소리가 있다. 낮잠을 자며 코를 고는 사자도 있고 물장난하며 놀고 있는 코끼리도 있다. 숲에 가면 조용한 움직임을 만난다. 말없이 긴 다리로 걷고 있는 황새도 만나고 황새의 생각이 궁금한 토끼가 풀밭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같이 산책하며 나눈 이야기는 숲 속을 산소 같은 언어로 가득하게 만든다. 그곳에서 가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숨을 쉰다.

책방에는 동물 친구들과 크고 작은 나무들 이야기가 있다. 꽃과 나비 이야기도. 그러나 그들의 생존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는 깊은 슬픔을 낳는다. 숲에 마을이 생기면서 그곳을 떠나야 했던 동물들. 서로 공존하려는 방법을 함께 고민했던 사람들. 그곳을 그리워하는 숲 친구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사라진 친구들의 슬픔을 슬퍼하는 알레고리. 직설적이지 않지만 구체적인 삶이 숲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숲과 숲 밖에 있는 무엇을 비끄러매는 공감의 울타리다.

건조한 날씨는 마을 주위를 감싸고 있다. 바싹하게 메말라 있는 자연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입을 마르게 한다. 빨간색의 ‘산불 조심’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전국 곳곳에서 불에 타고 있는 숲을 생각하면 애가 탄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산불 소식이 애간장을 타게 한다. 숲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어디로 피하고 있을까.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동물과 식물들은 어떻게 되는가.

산불로 급하게 자리를 옮기는 생명들이 이곳으로 오기에는 너무 멀지만 산과 물을 건너 어디선가 보금자리를 준비할 동물에게 우연을 기대한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던가.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기술이라고. 우주가 인간을 돕는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질문에서 답을 찾는다. 도움이 곳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대칭을 이루지 않아도 불완전하지 않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한다. 내 시야가 컬러에서 흑백으로 변하는 시간에, 내 몸의 온기가 잠시, 빠져나가는 시간에 숲과 함께한다. 한 해의 분기점은 계절의 리듬이다. 리듬은 삶의 동력이다. 햇빛과 바람과 구름과 비의 리듬으로 모든 생명이 뒤섞인다.

마을을 산책하다 책방으로 들어선다. 책방 주인장이 반긴다. 안부를 전하는 주인장 얼굴에서 책방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음이 읽힌다. 숲을 산책하기 위해, 책을 읽기 위해 이곳에 오는 사람들 이야기가 공간을 뚫고 숲으로 퍼진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산울림이 된다. 겨울 동안을 지켜낸 나무들의 힘찬 물오름이 책장을 넘길 때도 느껴진다.

책방에서 나오니 그네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가 눈에 보인다. 엄마로 보이는 여인은 나무 의자에서 책을 보고 있다. 주인장은 책방에서 숙박하는 가족이라 소개한다. 숲에 와서 책을 보며 하루를 보내는 이들에게 오늘 하루는 어떤 날일까. 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삶 중에서 숲 속 책방에서 보낸 하루의 시간은 어떨까.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보다는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었을까. 혹, 침울했던 표정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을까. 오히려 지루함까지도 즐거운 시간이었을까.

내가 숲에 산다면 어떤 모습일까. 동물이나 나무, 꽃이나 풀도 좋지만 길가 한쪽에서 해를 기다리는 작은 돌이라도 좋겠다고. 또 봄기운을 느끼며 땅을 마주하며 식물과 놀고 동물에게 길을 터주는 마을 주민들의 보들보들한 마음을, 산책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숲 향으로 가득하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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