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잇다

『엄마의 말뚝』 (박완서, 세계사, 2012)

by 남쪽맑은물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그 시대 배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배경은 어쩌면 개인 경험이 모여 이루는 강물 같은 것이어서 그렇다. 역사는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지금을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 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게 형성된 시대를 나타내는 배경은 달라지기도 하고 무언가를 강하게 붙드는 것으로 남기도 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사는 현실이 변화를 불러와 역사가 되듯이 말이다.

대한민국이 남과 북으로 나뉘기 전에 하나였던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 한국전쟁 이야기는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기 쉽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임에도 경험하지 않으면 그림처럼,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이처럼, 삶이 배제와 고립과 상실과의 투쟁이지만, 전쟁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 언어가 배제된 이미지 만으로도 끔찍한 전쟁이.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려면 시대를 이어오는 사람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박완서의 작품, 『엄마의 말뚝』에서 주인공 ‘기숙’ 씨 이야기는 전쟁이 시대의 언어로 들린다. 전쟁을 겪은 이들의 절박한 표현이 잘린 언어의 부품이나 조각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심성이 있다. 나도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엄마인 ‘기숙’ 씨 언어에 귀 기울이는 시간만큼은 진솔해지기를 희망하면서 이 글을 쓴다.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는 불편할 수 있는 약점이 있다. 고갈되는 심리적 경험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다 보니 그렇지 싶다. 시리고 아린 이야기가 상상이 아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프고 슬프고 화가 나는 심리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이야기가 계속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이야기. 어쩌면 무언가를 오염시킬 수 있는 공포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불안도 감내하면서 속을 털어놓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진짜의 자아와 가짜의 자아를 구별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안아주거나 타인을 안아주는 행위에 용기를 갖기도 한다. 공감하는 일은 완전한 고립이 없음을 증명하기도 하니까. 인간이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공감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기본 속성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매우 쓸쓸하다. 소설 속 인물이 그 대상이 되는 일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다. 거리낌 없이 보여 주고 들려주기 때문에 함께 목욕하는 기분이랄까. 지난한 과거를 숨기고 싶은 마음마저…. 허구지만 신뢰감이 있는 유언장처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 사람 인생에는 진정성이 있다. 온전한 공감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엄마의 말뚝』의 주인공, 기숙 씨를 만난 일은 행운이다.

‘어머니 함자는 몸 기(己) 자, 잘 숙(宿) 자여서 어려서부터 끝 자가 맑은 숙(淑) 자가 아닌 걸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고 기숙 씨의 딸은 생각했다. 엄마이기 전에 ‘기숙’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에 계산할 수 없는 은밀한 삶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비교하거나 수치화할 수 없는, 오로지 ‘기숙’의 이름으로 살아온 인생을. 기숙 씨에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근대화, 현대화를 지나면서 차갑지만 깔끔한 삶을 살아온 인생이 있다.

이 시대가 건네는 차가운 시선과 따뜻한 시선을 느끼면서 시대를 넘어가는 우리. 세상의 불신과 배제, 고립과 상실을 견뎌왔던 기숙 씨의 지혜로움을 무엇일까. 스스로가 선택한 시대가 아님에도, 애초에 선택할 수 없었지만, 질곡의 순간마다 고개를 드는 기숙 씨의 당당함은 무엇일까.

기숙 씨는 그 존재의 확신을 위해 말뚝을 박으며 살았다. 말뚝은 그녀의 전부였으며 그 전부는 포괄적이다. 자기 정체성에 자녀의 삶이 온전히 포함되어 있었으니. 말뚝과 말뚝으로 연결된 삶, 그녀는 그것을 바느질로 이어갔다. 억눌린 감정과 기억을 손바느질이라는 노동을 통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울분을 잠재웠다. 송도에서 개성, 서울로의 이동 그리고 서울의 문안과 문밖의 삶에도 반드시 바늘과 실타래를 챙겼다. 상흔이 뚜렷한 현실이었지만,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도록 삶을 이어 나갔다. 야무진 손끝으로 기생 옷을 만들 때, 상것이라 비하한 저속한 심리 이면에 신여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인간 자존을 꿈꾸었다. 그의 바느질은 불완전한 내면을 파고드는 저속함까지도 자존감으로 이어주었다. 찢어지고 갈라지고 구멍이 있는 곳조차도 바느질로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을 대처에서 잘 키워보려는 엄마 마음은 삯바느질에 녹아 있었다. 바느질은 어떤 어려움이라도 잘 이어 붙이겠다는 맹세에 가깝지 않았을까. 어떤 상황이라도 두 아이를 잘 키우고 말겠다는 결의. 그런 맹세나 결의에 동의하지 않은 현실일지라도 그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느질이었다. 그러나 그는 종내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한 줌의 가루가 된 아들의 뒤를 이어 떠나며 참척의 아픔이 끝났으니까. 그의 이름, ‘기숙’으로 된 말뚝을 남기고….

그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을 반추한다. 그리고 반추한 일상으로 주변 사람을 본다. 낯선 듯 낯익은 얼굴, 사연이 있는 얼굴, 밝지만 그림자를 끌어안은 얼굴, 주름 사이에 꽃이 핀 얼굴, 인생이 마냥 찬사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기에 시선을 허공에 두는 얼굴도 있다. 그런 얼굴로 변화하는 시대에 공감하려 하늘에 눈을 맞춘다. 그 시선을 거두다가도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그곳에서 지속하려는 삶을 찾는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순간이 오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기에 그 자리에 안착할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자전하는 삶을 믿는 일이다. 가끔 악몽으로 과거가 되살아나 낙담과 좌절로 눅눅한 종이 같은 마음이 될 때도 뽀송해지길 기다리듯이. 그때 그 마음을 꿰매면 될 일이다. 외로움이 상실로 다가온다 해도 공감으로 그 자리를 메우면 생각보다 좋은 마음이 생기니까. 그러면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기피, 거부를 실뜨기로 이어 붙여 새로운 생각의 오브제를 만드는 일, 거기에 자기 말뚝 박는 일을 우리의 엄마, ‘기숙’으로부터 전수받는다. 우뚝 서 있는 말뚝이 기숙이고 그 말뚝의 가치를 꿰매고 붙이는 일을 기숙이 했으며 그렇게 이어진 삶의 주인공도 기숙이었다. 그것이 그의 이름으로 우뚝 서 있는 엄마의 말뚝이다.

『외로운 도시』(올리비아 랭 지음, 어크로스)에서 조 레너드(Zoe Leonard, 시각예술가, 1961~ )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오렌지 두 개를 먹었는데 껍질을 그냥 내버리기가 싫었다. 그래서 무심하게 그걸 꿰매어 복원했다.”

꿰매기는 배제와 고립과 상실의 고통을 어루만진다. 꿰매는 세계를 아는 예술가, 꿰매는 일이 묘한 일임을 아는 우리, 실이나 끈으로 이어 붙이고 기워 붙이는 것이 인생임을 말뚝으로 남긴 기숙. 우리는 손끝으로 이어진 인연이다.

엄마가 그리울 때, 기숙의 이름을 생각하고 내 이름을 생각하련다. 맑은(淑) 잠을 잘(宿)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