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모으는 사람』 (모니카 페트, 풀빛, 2001)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는데 타이밍을 잡을 수 없다. 슬슬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카페 유리창으로 보이는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에 눈이 쌓인다. 어머, 눈이 펑펑 내리네.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다양한 서사가 생각났지만, 많은 은유를 도려내니 이 단문만 남는다. 너무나도 평범한 문장이.
그런데 커피 향도 좋고 음악도 좋고 에스를 만나서 정말 좋은데, 다 좋은데, 지금 에스와 나누는 이야기는 싫다. 어떤 복잡한 모양을 만들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내리는 눈을 보면서 나눌 이야기로는 너무 자본적이다. 에스는 자기가 하는 말에 반응이 느린 나 같은 무지렁이가 답답한가 보다. 인공지능 시대, 달라져가는 경제구조, 가상화폐의 가치 등등을 잘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정보를 쏟아낸다.
가속이 붙어 내리는 함박눈은 도로를 없앤다. 차선도 사라진다. 마치 화폐의 가치가 어디로 사라질지도 몰라 불안해하듯 하강하는 눈발은 비틀거리다 어디에든 안착한다. 그러다 다른 눈과 섞인다. 앞으로는 가상화폐밖에 없다고 말하는 에스가 하는 말은 어디에도 섞이지 않고 또렷하다. 화폐를 사고파는 방법을 알려주는 에스의 목소리가 웅변가처럼 우렁차다. 송알송알 눈이 내리는 한낮의 도시를 바라보며 듣는 이야기로는 상당히 직설적이다. 이렇게 눈이 오는데….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마음 저 편에서 꿈틀댄다.
아침이면 같은 시간에 길을 나서는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는 매일 가방을 메고 거리를 다니며 하루 종일 생각을 모은다. 그렇게 가방 속에 모은 생각을 집으로 가져간다. 집에 돌아오면 모아 온 생각을 선반(ㄱ에서 ㅎ까지) 나눈다. 이때 고민한다. 어떤 아름다운 생각을, 어떤 개성 있는 생각을 기역 선반에 넣어야 할지, 니은 선반에는 어떤 너그러운 생각을, 어떤 따뜻한 생각을 넣어야 할지, 디귿 선반에 어떤 대견한 생각을, 어떤 잠에서 깨어난 생각을 넣어야 할지를.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려내기가 힘들지만 가끔 어딘가에 숨어 있는 생각까지 찾아서 선반에 정리한다. 일이 끝나면 기다린다. 그 생각들이 뿌리를 내려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을. 동이 트면 생각에서 피어난 꽃들이 녹고 알알이 부서져 햇빛 속에서 춤을 춘다. 아저씨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게 한참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아침이 된다. 그러면 아저씨는 아침 식탁을 치우고 다시 생각을 모으러 집을 나선다.
-『생각을 모으는 사람』 (모니카 페트 지음/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
생각은 부서지면서 어떤 춤을 출까. 춤을 추며 닿은 곳에서 어떤 생각으로 다시 태어날까. 살다 보면, 죽은 자를 어디선가 알고 지내던 사람의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죽은 자와 너무 똑같아 보여서 혹시 쌍둥이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경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아 놀란다. 알고 지낸 사람 모습 뒤에서 비치는 빛이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닐까라는 끝도 없는 생각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간다. 꿈이라 해도 그 꿈은 새로운 생각들로 생각을 지속시킨다. 살다 보면, 그냥 살아진다는 말은 새로운 생각들이 생성하므로 살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죽은 자의 모습도 알고 지내는 익숙한 산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웃어주듯이 그렇게….
생각은 조용히 마음을 기울이면 틈을 내주는 것 같다. 마스크를 써도 숨을 쉬듯이, 생각에 잠기거나 생각에 빠져 있거나 생각에 몰두하면 생각이 내어준 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매일 다니던 길도 새롭고, 어디로 뻗을지 모를 손이 정답고, 익숙한 냄새에 안도한다. 꽃으로 피어 허공으로 부서진 생각의 뿌리는 정성 들인 마음의 틈으로 들어와 생각을 키운다. 죽었다고 느꼈던 생각이 살아나 꽃을 피우며 하루를 지낸다. 생각들은 조용히 자기 일을 한다. 그리고 매일 반복한다. 그래서 생각을 모으는 일은 익숙한 듯 새로운 일이다. 생각은 아이였다가 노인이 되고, 동물이었다 식물이 되고, 우주인이었다가 외계인이 되곤 한다. 그렇게 생각은 사계절을 지내면서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생명의 불씨가 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눈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온종일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기억한다. 집에 갈 길이 걱정이다. 삼십 분 만에 도로는 엉망이 되었으니 서둘러야 할 때다. 에스는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나는 것이 아쉬운 눈치다. 좋은 정보를 주고 싶어 하는 에스의 열정에 보답할 시간이 궁색하다. 에스는 계속 가상화폐를 모을 거라 했다. 적금 들 듯이 차곡차곡. 에스의 확고한 생각에 보탤만한 확고한 무엇이 없어 입술만 달그락 거린다. 그래, 중요한 일이지. 생존의 안락을 위해 적금 들고, 보험에 가입하고, 금을 모으는 일. 주식이나 가상화폐로 투자하고 불안한 미래를 위해 준비할 것이 많지. 독산 술을 취해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때론 필요하지. 상처 난 자존심을 들여다볼 염려가 축소되는 것이라면, 모두 중요한 일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자본을 떠나서 사는 일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니 미리 준비하는 그들의 능력이 부럽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모두 땀 흘리며 일하고 머리를 쥐어짜며 일한다. 재미있어서 일하고 재미없어도 일한다. 시급의 가치를 계산하고 시간과 돈의 관계를 삶이라는 논리로 확고하게 붙든다. 그렇게 하루를 일궈나간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으면서 매일을 성실하게.
나에게 열의를 다해 설명해 준 에스의 정보로 생각을 모은다. 에스의 이야기가 꿈속에서 만난 이야기는 아니니까. 분명하게 존재하는 자본 생태니까. 그저 나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할 뿐이다. 내 마음이 움직이질 않고 말이 궁색해서 달라지는 세상을 읽어내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니까. 무언가 보이지 않지만.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며 느리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언제 그칠지 모를 눈발을 바라본다. 와이퍼는 가차 없이 눈의 흔적을 지운다.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눈과 또 내리는 눈 그리고 또 사라지는 눈. 흔적을 지워도 남아 있는 것들이 지천인 세상에 사라진 눈에 마음이 간다. 굳이 모을 필요가 없는 눈이기에. 눈이 그치지 않고 계속 온다.
생각이란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어떤 것이라면, 눈이 사르르 녹았지만 눈이 오는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 언제인가, 어디서 인가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무엇들. 고로 생각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녹는 눈을, 자동차 유리창에 내려앉자마자 사라진 눈을, 거리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을, 조만간 다 녹아버릴 온 세상의 눈을.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에스에게 보낸다. 에스에게 잘 도착했다는 답장과 함께 가상 화폐에 대한 정보를 받는다.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찾아야 할까.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빛으로 부서지는 생각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