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에

『깊은 밤 부엌에서』(모리스 샌닥, 시공주니어)

by 남쪽맑은물

무생채를 먹으며 유독 며칠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낸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생채를 씹을 때마다 무채를 썰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무를 씻어 칼질을 하던 그녀의 마음이 이와 이 사이에서 부서진다. 마치 무의 아우성처럼 들린다. 한석봉이 어두운 밤에도 또박또박 글씨 연습했듯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사각사각 무채를 만든 그녀의 손동작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일정한 박자를 타고 흐르는 감정이 무를 씹는 이 사이에서 요동친다.

깊은 밤 부엌에서, 도마에 닿는 칼질 소리는 그녀의 가슴을 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하얀 무가 빨간색으로 물드는 시간 동안 봉두난발 했을 생각들. ‘윤기를 잃어가는 머리카락처럼 의미가 희미해지기를, 안갯속에서의 일처럼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었으면’하는 마음으로 무를 난도질했을 것이다. 빨간 고춧가루 양념을 버무린 생채는 그녀의 처절한 피울음이었을 것이다. 마음 구석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시뻘건 기억을 떨칠 수 없음을 답답해하며 긴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일생에서 3분의 1은 잠을 자면서 보낸다. 열 살이면 삼 년을, 서른 살이면 십 년을, 환갑이면 이십 년을 잠잔다. 그 시간은 꿈을 꾸는 신비로운 시간이다. 잠을 자야 꿈을 꾼다. 꿈은 선물 같은 것이다. 꿈이 주는 메시지는 상징이며 꿈은 이미지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니 무의식의 세계다. 오히려 사람 말보다 꿈속 이미지를 믿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의식 세계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꿈은 의식 세계에서 믿었던 것을 다시 해체하고 자유로워지는 것, 시각화된 뇌는 보고 싶은 무의식 욕망이 현현한 꿈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꿈은 자유로운 영혼이 유영하는 것이며 진정한 휴식이다. 하늘을 날며 벽을 통과하는 판타지처럼.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무엇을 할까. 몽유병, 야경증, 기면증, 등등, 휴식을 해야 하는 시간에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내가 될 때, 긴긴밤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밤새워 놀았던 젊은 시절로 여행할까.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해야 했던 날들과 사람들을 생각할까. 구름처럼 자주 바뀌는 변덕스러운 세상 이치를 향해 욕이라도 할까. 옛일이 되어버린 기억을 아이스크림 퍼먹듯 달콤하게 편집할까. 아니면, 멍한 시선으로 어두운 빈 공간을 유령처럼 서성일까. 야옹야옹하는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밤거리를 걸을까. TV나 책도 눈이 아파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눈을 감고 기도 할까.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꿈인지 상상인지, 아이가 깊은 밤 부엌에서 아저씨들과 빵을 만들다가 아침을 맞는 그림책이 있다. 깊은 밤에 아이는 벽을 통과하고 아래층 부엌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 새로운 풍경에 풍덩, 빠진다. 부엌에는 낯익은 가족이 아닌, 낯선 사람들이 있다.

부엌에 있는 낯선 이들은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표정이 즐겁고 익살스럽다. 어쩌면, 불청객인 아이가 와서 주위가 혼란하게 하는데도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이 함께 빵을 만든다. 아침에 먹을 맛있는 빵을 만드는 일은 즐거운 일이니까. 아이 얼굴도 재미로 가득하다. 아이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반죽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찰흙으로 모양을 빚듯, 반죽을 몸에 뒤집어쓴 채 마음에 드는 모양을 만든다. 아이가 반죽이 된 듯, 아이의 몸은 묘한 형체가 된다. 알몸으로 맘껏 놀고 있는 아이는 벗어버린 의식의 형상화다. 집합적인 정신세계에서 탈출하는 한 인간이 무의식 욕망으로 향하는 적극적인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아이는 좋은 기분으로 하늘을 날고 날아 우유병에 풍덩 빠지고 밀가루에 부어진 우유와 함께 밀가루를 휘젓으며 논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노래 한다. 맛있는 빵이 만들어질 거라는 기대에 잠자리로 돌아와 깊은 잠 속에 빠진다. 잠을 자고 나면 빵은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맛있는 빵을 만들던 상상은 짙푸른 밤의 숙면이다. 깊은 밤 부엌에서, 무의식이 의도하는 의식의 광장에서 꿈을 꾼다. 상상력을 공유하는 일은 숙면에서 일어나는 꿈이니까.


불면은 불편한 마음의 용트림이다. 불편한 이유는 온 세상에 있는 색깔만큼 많을 것이다. 울음보따리 몇 덩어리가 밤에 흐느적거린다. 알 수 없는 어떤 기억이 뿌리를 찾아 생각이라는 몸통을 송두리째 흔든다. 거미줄에 걸린 거미처럼 후회로 버둥거리는 것이다. 차라리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며 도리질하지만 정작 꿈일 리가 없는 현실이라는 독성을 견디기가 힘들다. 꿈을 꿀 수 없으니 감동도 있을 수 없다. 감동을 잃으면 죽은 거라고 했던가. 정작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것이 지독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잠을 잘 자고 나면 불편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거친 생각이라는 무덤에서 벗어나 하늘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고 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이 깨면 새로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하룻밤을 잘 지내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모든 상처와 망상을 알몸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것으로 알몸을 감싸는 일은 어두운 밤에 일어난다.

깊은 밤, 덜 아문 상처 딱지를 떼어내어 마음에 남아 있는 아픔과 피가 아직 배어 나오는 상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무엇을 해야 하나. 숫자를 세거나, 아니면 손가락으로 도형을 그리거나, 생각지 못한 모양의 도형에게 이름을 지어주거나, 번개처럼 스친 기억이 생각나 들어보지도 못한 시나리오를 쓰거나, 간절했던 마음에 정전기가 일어나 소스라치거나, 그러다 희붐한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 즈음, 스르르 잠으로 빠지거나.

깊은 밤 부엌에서 빵을 만들었던 알몸의 아이는 날 것의 생각 덩어리다. 그 덩어리는 꿈이다. 꿈은 숙면에서 만날 수 있다. 꿈을 꾸지 않으면 미쳐버린다. 꿈은 배설물이기 때문에 꿈이 필요하다. 아무도 없는 망망한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본성을 직시하는 일은 꿈속에서 일어난다.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상력이 꿈으로 변한다. 곤곤한 삶에서 꿈이 탈출구가 된다. 꿈꾸는 시간은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그녀가 만든 무생채는 맵고 달고 짜다. 생각이 요동치면 손도 떨리는 법, 더구나 어떤 슬픔이 따라오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과잉일 때 마음의 진동이 지나도록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는 깊은 밤 부엌에서 달콤하고 쫀득한 빵을 만들고 누구는 무생채를 만든다. 누구는 냉장고 문에 기대어 와인을 마시다 아침을 맞이한다. 핏빛의 와인이 오히려 아픔을 극대화해 카타르시스가 된다고 했던가. 새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냉장고 문 알림 표시에 새어 나오는 빛에 눈시울이 흔들린다고 했던가.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꿈은 밤을 볼 수 없다. 그러니 밤을 기억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밤을 굳이 보려고 하지 않으니,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을 꾸는 숙면은 따뜻하고 아늑하다. 깊은 잠에서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자신을 만난다. 꿈은 보이지 않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분화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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