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14)
10여 년 전 숲 속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을 샀다. 이미 5·18 관련 책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고, 출판사 서평을 읽은 후라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던 책. 이 책은 모든 국민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던 책방 주인의 말을 기억한다. 나도 책을 읽는 내내 교과 과정이든, 독서프로그램이든, 이 책을 읽은 이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책방 주인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2024년 온 국민에게 기쁨을 안겨 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인간에게 잠재하고 있는 잔인한 폭력성의 또 다른 증거인 12·3 계엄령 소식을 들었다.
2025년 늦가을에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80년 5월 광주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현실과 동떨어진 감각이 아니었다는 기시감으로. 이 작품을 꼼꼼하게 읽으며, 입술을 깨물고 읽으며, 침묵의 세계에 갇혀 있는 말을 만났다. 귀하고 귀한 말을 만났다. 그리고 무서웠다. 고귀한 생명에 대한 생각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짓밟았는지를. 그리고 세상 곳곳에서 여전히 말을 말살하고, 생각을 말살하고, 삶을 말살하는지를.
“누군가에게 조그만 라디오를 선물 받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디지털 계기판에 연도와 날짜를 입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걸 받아 들고 나는 ‘1980.5.18.’이라고 입력했다.”(204쪽)
우리는 1980년 5월 18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이미 그 시간은 지났으니까. 시간을 되돌린다고 참혹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지금은 2025년이고 11월이니까. 그리고 여기는 광주가 아니니까.
우리는 1980년 5월 18일에 어디에 있었나. 아마 나는 서울에 있었을 것이고, 학교에 있었을 것이고, 지는 봄꽃을 아쉬워하면서도 여전히 피고 지는 장미향을 맡으며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불안한 젊음을 침묵하고 공처럼 튀어 오르는 젊음을 억누르고 희미한 젊음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일, 그것은 폭력이다. 침묵이란 그저 말하지 않는 것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침묵은 말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존립하는 어떤 것들이다. 침묵은 말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이며, 말을 하기 위해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폐되어 있는 침묵은 드러내져야 한다. 분명하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서 인용)
80년 광주.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강요당했던 침묵의 세계를 해체하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다. 말을 할수록 할 말이 많았다.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지만,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되기에 치가 떨리는 고통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자기가 당한 치욕스러운 상황을 말할 수 있겠는가. 끝내 말이 되지 못하는 말. 여전히 침묵에 갇혀 있는 말. 시작도 끝도 없는 침묵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하는 것. 그것을 선택한 이는 침묵 말고는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색 체육복 바지를 입은 중학생 동호와 동호의 친구 정대 그리고 스무 살 정대의 누나 정미는 죽었다. 피 묻은 옷, 머리카락 그리고 잔털들, 살갗, 근육, 내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그들의 혼이 있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수십 개의 다리가 달린 괴물의 사체처럼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의 죽음. 악당은 그들이 가진 그 무엇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털어 부은 석유불로 활활 태웠다. 그들을 태운 불빛은 대낮 같이 환한 광기였다. 이미 맑고 검은 눈동자가 사라지고 없는 세상에는 검은 연기만 가득했다.
자기 삶에서 어떤 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게 하는 것이 지독한 고문이다. 그저 굶주린 짐승과 같은 몸뚱어리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 고문이다.
오줌똥 지리도록 끔찍한 고문을 당한 김진수. 여성적인 외모 때문에 변칙적은 고문을 당한 김진수. 발가벗기고, 은밀한 부위를 추행당하고 동물적인 학대를 당한 김진수 그리고 조카뻘이 되는, 사람을 몇 번 죽일 뻔했던, 다시는 정신병원에서 나오지 못한 영재. 트럭에 실려가 어디론가 끌려간 후 교도소에서 씨를 말려야 하는 빨갱이 연놈이라며 자궁을 피투성이로 만든 고문을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여전히 침묵하는 은숙. 그리고 선주와 성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들.
아물지 않는 기억은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역사에서 우리는 잔인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증명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과 인간이라는 치욕이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은 모두 팔십만 발. 광주 인구는 사십만.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런데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17쪽)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라 불려지는 동안, 미묘한 불협화음이 울려 퍼지는 동안, 나라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18쪽)
침묵에 갇힌 말이 눈을 뜬 달빛 아래에서 알라딘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침묵을 깬다. 오직 말만 존재하는 세상이 없듯이, 침묵만 존재하는 세상이 있을 수 없다. 침묵을 깨려는 사람들이 침묵을 뚫고 침묵에 담겨 있는 말을 할 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을 강하게 만든다. 어떤 것은 으스러지고 망가지고 버려진, 효용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목적성을 드러내지 않는 모든 것이다. 다시 온전한 것으로 회귀하려는, 성스럽기도 한 모든 힘이다.
침묵 속에서 더욱 강해진 말들이 선과 악, 탄생과 죽음과 같은 원초적 현상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드러낸 악성을 되돌릴 수 없듯이, 침묵에 갇힌 말을 되돌릴 수는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아픈 기억은 원망스러울 만큼 고통이기에 말을 해야 한다. 그것도 단호하게.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서 안돼.”
내면을 숨길 수 없는 얼굴들, 점점 인간을 믿지 않게 된 얼굴들,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을 하는 얼굴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입니까? 누가 가장 나쁜 얼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