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학 개론

by 남쪽맑은물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1865)에 등장하는 양복 조끼 입은 흰 토끼를 기억할 것이다. 독특한 인물이다. 어느 날, 앨리스는 토끼의 이상한 낌새를 아는지 모르는지, 의심 한 톨 없이 토끼를 따라간다. 앨리스가 도착한 곳은 땅 아래, 토끼 굴. 그곳에서 현실과 다른 규칙으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하고 기이한 일들로 눈이 동그래진다. 토끼가 가정부나 하트왕, 여왕의 하인이 되면서 마치 전령 같은 역할을 말끔하게 수행한다. 기준이 모호해지는 세계에서 작은 실랑이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런 일들이 축제처럼 흥겹다.

꿈에서 앨리스가 만난 토끼는 이상하고 호기심이 가득하고 이미 경험한 것을 뛰어넘는 은유의 세계다. 그곳에서 종종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상야릇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상하다는 것은 괴팍하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설득력 있는 장치다. 혼란은 수수께끼를 풀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처럼, 흥미와 관심으로 이어지고 예전과 다른 자아를 만나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어제로 돌아가 봐야 소용이 없어. 그때는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혼란을 겪은 뒤 달라진 점을 받아들일 때 항상 기쁜 것만은 아니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엄청나게 흔들리는 자아로 인해 고민하게 되니까.

동네 책방에서 토끼를 만났다. 책방에서 토끼를? 그렇다 토끼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책방에 택배를 보내왔단다. 책을 사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라는 간단한 편지와 함께. 흥부네 박이 펑, 터지듯 택배 상자를 가득 채운 물건이 금은보화처럼 쏟아졌다고 한다. 책 표지를 감싸는 헝겊 커버와 금속으로 만든 책갈피, 필통과 여러 용도를 사용할 수 있는 주머니 그리고 헝겊으로 만든 다양한 동물 모양 인형까지.

그중 빗자루를 들고 있는 토끼 인형을 책방 주인장이 선물로 주었다. 옅은 갈색 토끼는 두 귀와 까만 눈동자, 검은 실 바느질로 앞으로 돌출된 입을 표현한 얼굴이 상당히 귀엽다. 녹색 푸른색 나뭇잎들과 노란색 주황색 꽃무늬 가득한 치마 그리고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토끼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돋보이는 반면, 손잡이가 긴 빗자루를 가슴에 품고 있어 마녀 같기도 하다. 책을 읽고 있던 앨리스가 토끼 굴에 빠져 어리둥절했던 것처럼, 빗자루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이 두둥실이다. 토끼를 책장 옆에 걸어두었다. 어쩌면 빗자루를 타고 토끼와 함께 하늘을 날아 이상한 도깨비 나라에 갈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마음 한편이 아리고 뻐근했다. 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손을 잡고 싶었을까. 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정성이 녹아있는 물건에서 쓸쓸한 향기가 났을까. 아마도 예술을 하고 있는 Y가 했던 말을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Y가 예술이라는 낱말이 싫다고 했던 말을. 무엇을 잘하는 사람이 무엇을 더 잘해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헤매는 회의와 배타가 혼합된 자조적인 허무의 말을. 무책임한 답변조차 찾을 수 없는 상흔이 깊은 Y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성깔 있는 토끼도 만났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아작, 2022)에 등장하는 예쁜 전등 토끼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9쪽)라는 화자의 할아버지 말처럼, 예쁜 토끼 전등을 만들어 저주를 내린다. 토끼는 가정을 파탄한 자, 손해를 입혀 사업을 망하게 한 자, 감언이설로 꼬드겨 죽음으로 몰아간 한 자에게 복수를 감행함으로써 인과응보를 증명한다. 저주용 토끼 전등을 건물 안에 둔다는 것은 파멸을 말한다. 전등이었던 토끼가 살아 움직이면서 악을 끈질기게 공격한다. 썩어버린 사회 부도덕을 징벌한다. 사회 약속을 지키는 도덕적인 사람이 부도덕한 사람에게 억울한 손해를 보았다면 저주토끼는 즉각 해야 할 일을 한다. 뇌물과 뒷거래를 일삼은 사람에게 그로 인해 지독한 손해를 보게 된 사람을 대신해서 저주를 차근차근 돌려준다.

타인을 해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타인을 손해로 몰아가는 이들에게 몇 배로 손해를 되갚아 주는 설정. 인과응보를 확실히 실천하는 설정이 마음에 든다. 이익을 보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얻었던 것 몇 배로 반드시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큼 확실한 카타르시스가 어디 있을까. 그 피해가 후손까지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는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 이미 늦었다. 나의 잘못으로 내 자식과 자식의 아이들까지 연결된다면, 정말 저주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않을까. 죄의 씻김은 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하는 것.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면 알 것이다. 왜 저주 토끼를 응원하는지.

작가는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누군가는 세상을 너무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준이 되는 힘을 넘어선 변덕스러운 악성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악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거머리처럼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어떤 책임감조차 없이 발행하는 공수표 같은 위로와 격려로 입막음한다.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일을 아주 조용히 일어난다. 이 세상에 있을법하지 않은 악이 그리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추악을 알고 나면 선이라고 칭하는 행동이나 생각마저 말살당하는 느낌이다. 그러니 저주 토끼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의미를 알면서도 의미와 상반되게 사용하는 언어가 참으로 많다. 정직하면 바보가 되고, 성실하면 손해를 보고, 믿으면 사기를 당하고, 노력하면 자괴감에 시달리고, 공정하면 뒤통수 맞고, 상식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한다. 살아봐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살아봐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지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살고 있기에 살만한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인생이 이길 수 있는 시합이 아니며 성공이 셀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쯤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살만한 세상을 상상하는 자, 좋은 세상을 꿈꾸는 자를 몽환 속에서 헤매는 현실감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꿈꾸는 일에 사람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그 꿈이 하늘을 날다가 땅으로 떨어져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광물이 되는 꿈이라 해도, 암석권을 뚫고 맨틀을 지나 내핵에 도달해 단단한 물질이 된다 해도,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그 따위 상상이 위안이 될 때도 있지 않은가.

조끼 토끼, 빗자루 토끼, 저주 토끼는 상상 속 토끼다. 암울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버티게 하는 상상력이라도 없다면, 피곤하고 의아한 세상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진리, 신의와 선과 대립하는 것이 아주 많지 않은가. 바람직한 생각과 행동으로 중요한 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애를 쓰지만, 생각보다 쉬이 사라지곤 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중 중요한 것들의 결정체가 모여 좋은 환경을 형성한다. 환경은 현존하는 중요한 가치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무관하지 않다. 무작위한 폭력이 난무하는 환경은 불안을 부추기고 곤궁하고 비참한 삶으로 이끈다. 이때, 버틸 수 있는 가치를 찾아야 하는데 상상력이라도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감정이 부패하고 의욕이 방황하고 신실이 믿음에서 멀어질 때, 마음은 갈퀴질한 것처럼 엉망이 될 것이다. 은유의 세계든, 상상의 세계든, 게걸스럽게 먹고 먹히는 세계가 아닌, 들뜬 마음이어도 괜찮은 세계를 꿈꾸는 것이 허망한 일일까. 우리가 믿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앞으로는 정말 어려운 일일까. 전지전능한 신을 원하는 것도, 금으로 칠한 번쩍번쩍한 집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가슴이 아릴까.

예술이 덧없다고 생각했던 Y가 떠오르기 때문일까. 소박하고 완성되지 않은 아름다움에 빠져 허세 없는 작품을 만들던 Y가 모든 것을 포기했던 날이 잊히지 않기 때문일까. 우아한 예술 홍보자료를 보며 사라질 운명인 아름다움을 낱낱이 파헤치던 Y의 얼굴이 생각나기 때문일까. 아마도, 보기 흔치 않은 아주 작은 미학에 빠져있던 Y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상업적 논리를 무시하지도 못하고 자기 취향을 가질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자기만의 설계를 내던지며 뱉었던 지독한 말이 기억나기 때문일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작은 책방에 보내준 물건이 누구를 만나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웃음이 비웃음으로 느껴져 지금까지 지탱해 주었던 열정을 스스로 비웃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미적인 가치를, 열광하던 시절을 검열하면서 비탄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손으로 만든 작품에 깃든 정성이 형태 없는 얼룩이라며 찡그리고 패대기치고 눈을 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삶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순간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의 미적 감각으로 형성해 온 적극성을 띈 아름다운 형태를 보며 눈길 돌리는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한 것보다는 덧없는 것이 삶을 구성하는 것처럼, 장식이 필요 없는 단순한 것에 마음이 놓이는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소리 없는 웃음을 지을 것이다. 삶은 어떻게 가치를 판단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지만, 감각을 통해 받아들였던 많은 것이 시각적, 감성적으로 펼쳐진 풍경화임을 느끼게 할 것이다.

마치 조끼 입은 토끼가 가상 세계로 데려가듯이, 저주 토끼가 대신 저주를 퍼부어 주듯이, 빗자루를 든 토끼는 핑계를 만들어 멈춘 예술 세계를 조금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상상을 보여주면 어떨까. 공상을 넘어 넓게 펼쳐진 초원에 다다른 마음과 조절하여 신성한 감각을 회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정말, 망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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