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매일의 흔적이 다르다. 각각의 개별적 나날이 매일이다. 매일을 형성하는 것은 네활개를 치며 세상 도처에 존재한다. 그중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하는 사회 규범과 인간 사회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도덕과 다양한 질서는 일상을 가꾸어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 사실을 잊고 지내다 아리송한 상황에 직면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쩌다 그럴 수가, 이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이처럼 우리는 현실에서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사건 사고에서 생각을 점검한다. 그렇다고 어디선가 뿜어져 빗발치는 통찰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통행하는 길도 방향이 있고 자전거 다니는 길도 따로 있으며 대중교통에는 노약자석이나 임산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오른쪽 통행에 길든 몸이 일본에서는 번번이 급행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길을 막아버린다. 일제강점기 잔재인 왼쪽 통행 시절을 보냈으면서 그 기억은 까마득하다. 몸은 이미 오른쪽 통행에 익숙하다. 그것이 사회가 정한 약속이니까.
길에서 넘어지거나 자전거와 부딪히기라도 하면 타인과 나,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생각한다. 사람이 얼마나 다쳤는가, 놀랐는가, 기물 파손 상태는 어떤가, 주위 상황은 괜찮은가, 하는 염려와 더불어 다가오는 법적 문제로 머리가 조금 복잡해진다. 사소한 일에서 더 사소한 일까지, 그 외에 다른 문제가 더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법(작디작은 규칙을 포함해)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더욱 세밀하게 고민하게 한다.
법이라는 낱말이 주는 느낌과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법이라는 어감이 주는 공포감이 있다. 공포란 앞보다는 뒤가 환해지는 것이라는 어떤 이의 말을 생각해 보면,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점점 뒤에서 환하게 추궁하는 몰이 같은 느낌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법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이 일상의 매뉴얼인지도 모른다. 순서에 따라야 하는 일들이 여기저기에 있지만 잘 알지 못해서 지나치는 경우가 있고 알면서 안 하는 경우도 있다(아마도 법을 잘 주무르는 엘리트 가르텔 같은 구역질 나는 선민의식과 독선 그리고 안하무인 같은 것). 그 이유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중간쯤, 너와 나의 중간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중간쯤, 권리와 의무의 중간쯤, 법과 위법의 중간쯤의 세계가 아닐까.
염색 금지 / 날계란 금지 / 오일 금지 / 걸리면, 즉각 퇴실, 출입 금지
이 글은 동네 목욕탕에 있는 안내문이다. 공중목욕탕에서 염색하고 날계란과 오일로 마사지하는 사람이 있는지, 목욕탕 여기저기에 붙어 있다. 타인의 배려차원에서, 목욕탕 관리 차원에서 계도 기간이 있었으나 이를 지키지 않은 사람이 있고, 그로 인해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어 중재가 필요한데, 그 방법이 참으로 치사할 수 있으니, 아예 협박 비슷한 강력함이 필요했나 보다. 오일로 인한 낙상 사고, 염색으로 인한 목욕탕 시설의 착색 문제, 날계란 냄새로 인한 불편 등등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달력이 강한 무엇이.
벌거벗은 사람들은 이 고압에 가까운 문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화장실에도, 내실에도, 탕 안 벽에도, 사우나실에도 붙어있는 붉은 글씨. 그런데 안내문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방법이 통할까라는 아연한 생각에 이른다. 매일 목욕탕에서 한나절을 즐기는 이들이 모이면, 엄청 시끄럽다. 마치 목욕탕이 사적인 공간인 것처럼 행동하는 무리가 있는데 목욕탕 측에서도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들이 몰상식한 행동을 할지라도 워낙 무리의 목소리가 커서 강력한 조치를 취해도 별 효과가 없다. 목욕탕 측에서 보면 인원수가 많은 그들도 고객이고 그들의 입에서 분출하는 소문을 무시할 수 없으니. 물론 그들이 염색을 하거나 날계란으로 마사지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목욕탕에서도 쫓겨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강제력을 띈 붉은색 문구를 사용할 밖에 없는 상황을 비웃는 이들이 있는 한, 달라지지 않으리라. 법을 들먹일 일은 아니지만, 법 같은 강제성을 지닌 안내문을 여기저기에 붙이는 현상이 민망할 뿐이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를 읽으면서 고전으로 이끄는 법에 대한 사유는 한동안 혼란스러움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인간 존중은 평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권리와 권위의 가치가 평등에서 시작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으로서, 시시때때로 이 기본이 무너지는 것을 다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법의 진정한 의미가 혼탁했기 때문이다. 세대가 갈등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간극이 확대되며, 종교로 인한 대립과 젠더 이슈와 인종차별, 정치 이념으로 편을 나누는 사회 분위기가 고조되는 이유를 영 알 수 없기도 하지만, 법 고전에서 그 답을 알 수 있을까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각각의 주장으로 펼쳐지는 비난이 넘치고 넘치는 세상. 더구나 비난과 갈등이 더욱 다양해지고 섬세해지고 있어 오히려 현실이 현실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세상. 누군가에게 이로운 일이 누군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인간 존중은 서로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무색해지는 현실에서, 공존은 경계의 극단을 허무는 것이며 경계의 유연함으로 그 영역이 확장하는 것인데 그 의미가 무색해져서 아득했다. 이런 사실을 점점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현실이 막막했기에 책을 읽으며 의문을 제기하곤 했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 존재가치에 대한 권리 영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상황에 따라, 개인이나 단체에 주어진 권리를 어디쯤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그 상식이 애매모호하다 보니 누군가는 폭군이 되고 누군가는 희생양이 된다.
독일의 19세기 법학자 예링은 “양보와 화해, 관용과 온유, 조정과 권리 주장의 포기 등은 나의 이론에서도 역시 합당한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라며 분쟁의 가장 정당한 해결 방법이 화해라고 했다. 권리에 대한 경시와 인격적 모욕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형태로서의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의무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분쟁의 화해 방법인 합의는 서로의 이견을 조율하는 일이다. 적당한 지점을 찾아가는데 삶의 지혜가 한몫한다. 법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법의 존재만으로 갈래갈래 흔들리는 마음이 방향을 잡는다.
변화가 재앙으로 탈바꿈하는 이유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합의를 한다는 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으로 향한 힘없고 어리고 작은 신호는 생존의 변화를 예고하지만 눈치채지 못하면 바스러진 무력감으로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
“사회계약은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수립함으로써 시민들 모두가 같은 조건으로 계약하고 또 모든 권리를 똑같이 누린다.” (30쪽)
어쩌면 목욕탕이라는 곳을 공동체라고 보았을 때, 그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무언의 계약 상태에 있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위해 암묵적으로 계약에 동의한다. 그 계약이 흔들렸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다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고문 같은 문구로 몇몇 사람 행동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방치할 수 없는 행동을 단순한 심리적 충동으로 표현한 안내문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나친 부분이 있지만 그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고치기 귀찮아도 고쳐야 할 것을 고쳐야 하는 것. 그것이 세상 권리를 평등하게 누릴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