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중 신부(베드로/도미니코 수도회, 화가)의 채색 유리를 본 것은 대전 KAIST 학술문화원 천장에서다. 가로 10.12m, 세로 7.33m 인 건물 천장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다. 신부가 채색한 도안을 세라믹 컬러 페인트로 유리판에 옮겨 벽면이 아니라 20m 높이 천장에 설치한 작품은 투과된 빛에 따라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특별 전시 제목은‘빛의 소명(召命)’이다. 빛의 존재를 색유리에 표현했는데 상당히 아름답다. 수천 가지 색을 머금은 빛이 유리를 만나서 색이 되고 물감을 만나서 다시 빛이 된다. 빛이 없으면 암흑이니 암흑은 빛이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빛이 없는 암흑이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빛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암흑에 갇히지 않으려 인간은 궁극으로 무엇을 한다. 결국 사상이나 종교란 인생에 있어서 무장(武裝)에 불과한 것 아닐까.
예약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인증 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이기에 마중 나온 담당자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간단한 설명으로 안내를 대신하고 사라진다. 학생들이 연구하는 장소이기에 홀로 조용히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과학과 신학이 만나 하늘을 향한 질문은 무엇일지 생각한다. 그러다 천장을 메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데….
“사람을 결합하고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예술과 과학의 구실은 같지만, 과학은 개념을 설명하고 예술은 미적 형상으로 말한다”라고 말한 김인중 신부의 의중을 헤아린다. 과학을 연구하는 곳에 예술이 공존하는 것은 시각적 시선이 삶의 입체감이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음을 막고 주의력을 보호하기 위해 귀마개를 하는 것보다 아름다움을 망막으로 기억하는 것이 정신을 비우고 생생한 정신을 채우는 데 좋을 것이다. 정신의 열정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장애물과 잡념을 건너가는 힘을 응축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의 손이 만든 왜소하고 조잡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의 경지에 이른 자연스러운 상태를 표현한 아름다움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익숙함 뒤에 있는 낯섦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돌연변이일지라도.
액자 그림을 연결한 듯한 천장화는 마치 물이 흐르고, 꽃이 만발하고, 깃발이 나부끼고, 액션페인팅이 펼쳐지고, 일필휘지 문장이 보이는데, 그 감상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리는 기도가 되고 음표가 된다. 그러다 눈길을 더욱 높은 공간으로 끌어올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그 너머의 사유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예술에 이르게 한다.
계단에 기대어 해를 받고 있는 다양한 회화를 본다. 계단마다 천장에 있는 작품을 액자에 담아 전시했는데 추상화 같다. 이 작품들이 천장에서 빛과 노닌다. 은유와 상상으로 하늘을 묘사한 그림에서 마치 새가 날아가는 환영을 보는 듯했다. 푸른색 음영으로 펼쳐진 작품은 커튼 뒤에서 천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마음 같다.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을 내는 추상화는 하늘에 닿는 창백한 영혼의 빛으로 보인다. 다정한 세상에 굴복하는 이가 없어야 한다는 바람을 갖게 하는 순연함과 닮았다. 오해에 의해 생긴 환상을 제거하는 것이 철학이라면(칸트), 환상에 의해 생긴 오해를 실현하는 것이 신학이 아닌가라고 그의 작품 앞에서 생각한다. 챙챙한 삶을 위한 불그스름하고 푸르스름한 빛의 소명은 반짝반짝 고르게 빛나고 있다.
“성당 채색 유리는 햇빛이 나지 않는 날에만 찬란하게 반짝였는데, 따라서 밖의 날씨가 흐리면 성당 안 날씨는 예외 없이 화창했다.” (마르쉘 프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민음사, 2014, 111쪽)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의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익숙한 예술 형태다. 성당이 갖추어야 할 의식을 표현하는 책임감 같은 것이 함유되어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과 품위는 빛을 막거나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오묘함을 신의 영역으로 품는 포괄성이 또한 종교의 특징이다.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를 고백하는 장소가 성당이다. 고백하는 이들이 순응하는 이념은 가장 자연스러운 빛의 소명이다. 기이하고 오래된 의식에서 거룩한 가치를 찾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기도하기 위해 모은 두 손에 빛이 나는 것이, 삶의 긴장과 열정을 조율하는 것이,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품는 것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의미다. 빛의 환희는 마치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몸과 마음이다.
성당 첨탑으로 향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기도다. 그것은 선(善)을 도모하기 위한 깊숙한 경청이다. 귀하고 윤이 나는 일이다. 유리를 다색의 빛으로 반짝이게 하는 마음을 흔들고 털어 하늘로 보낸다. 마음 가장자리를 빛으로 환하게 하는 것이 기도다. 어둑한 밤에도 하늘로 향하는 목소리는 마음을 빛나게 한다. 어룽진 그림자에도 기도의 빛이 사라질 수 없음은 우주의 인광(燐光) 때문이다.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망설이거나 모험하거나 중단하거나 포착하거나 물어볼 때, 빛과 함께 한다. 빛이 없으면 암흑이기 때문이다.
매번 자유를 느낄 때면,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롭다. 어떤 과장된 몸짓이나 표정도, 어두운 빌미를 숨기려는 고개 숙임도, 거짓말 같은 아뜩한 말투도 경계 회복을 위한 용기다. 미만한 인생이지만, 고리눈으로 훔쳐보는 삶이지만, 팔을 겯지르고 흉흉한 이설을 파괴하지 못하지만, 약간의 분노와 약간의 허영심으로 매몰된 의식이지만, 과일 속의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다. 그것이 매번 처음 마주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자유다.
자유는 유리에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저 생각이 색이 되고 문양이 되어 의미가 되는 것이 자유다. 유리에 빛이 반사하는 것이야말로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은밀한 욕망이 거룩한 장소로 튀어나온다 해도, 그것이 소명일 때도 있다. 온통 지뢰밭이라 여겨지는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려도, 그것이 운명일 때가 있다. 믿을 수 없는 담박한 이야기로 허청거려도, 그것이 우주의 중심일 수 있다. 지친 삶에 종속된 풍경일지라도, 그것이 생명의 근원일 수 있다.
낯선 색채로 인한 반사광이 의식의 상태들을 교란하거나 나란히 정렬할 때,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경외감이 생기곤 한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외부에서 스미는 빛을 저장한다. 그 빛으로 성당 내부를 바라보면 현실의 지평선 너머, 아득한 곳에 머물고 있는 자아를 만나곤 한다. 그 자아는 힘들여 공들이는 일들이 차례차례 안에서 밖으로 분출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어떤 외부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통로를 연결해 주는 능숙한 솜씨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두 손을 모은다. 자기 영혼에 둘러싸여 있는 시간이다. 내적 울림과 외적 울림이 영혼을 아름답게 어루만진다. 절망감조차 빛의 소명으로 영혼에 휩쓸린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을 머금는다. 어둠 속에서, 빛이 없는 흐린 날에 더욱 빛을 내는 이유다. 그 빛은 영혼의 반딧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