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읽다

by 남쪽맑은물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을 보는 동안, 안톤 체홉은 어떻게 여성의 사랑과 외로움, 욕망과 고독에 대하여 그리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남자임에도 여자의 세밀한 일상과 일상의 틈새를 읽어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19세기말 러시아에서 사랑에 눈뜬 여자의 욕망을 그려낸 작품에서 고독을 선고받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환적 욕망에 대한 리듬이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만날 수 있었다. 연극을 보면서 인간 내면에 흐르는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 연속성보다는 돌고 도는 성질이 있음을, 고독과 욕망의 관계는 역사와 신화로 중첩된 시간이 끝없이 반복하는 하나의 톱니바퀴 같은 시간의 순환임을 생각했다.

평범한 여성, 특히 결혼한 여성 심리를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한 작품에서 현실 도피와 불륜의 상관관계를 추적하게 했다. 현실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환상과 추상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통해 고독을 치유하고자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을 뛰어넘는 여성 이야기로 잠재의식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 인간이 지닌 보편 가능성에 대한 서사를 만날 수 있었다. 사회 규범과 도덕을 구분하는 잣대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특히, 욕망에 대한 고뇌와 도전, 고독한 일상을 일탈하려는 꿈은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간통죄가 사라진 요즘, 외도나 불륜이라는 낱말이 맨얼굴로 일상에 떠도는 부유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욕에 쓰이는 해괴망측한 말처럼, 음란하게 들리는 말처럼, 마치 정품으로 둔갑한 가품같이 어떤 부분을 숨겨야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불륜이 도덕 기준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찾는데 시간이나 에너지를 쓰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괴팍한 낱말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병리를 나타내는 낱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고독한 인간이 치닫는 극치에서 을씨년스러운 욕망을 빙자한 사실들이 외로움에 덜덜 떨고 있는 형국 같다고 할까.

생각이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은 어느 정도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관념이 아니라 삶의 공간과 시간을 빙글빙글 도는 마음 상태를 표출한 행동이라면, 위험을 감수해야 할 각오가 필요하다. 어지럼증으로 선택한 방향은 마치 빙빙 도는 원판에 화살을 던지는 형국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 대해 지극히 개별적이면서 복잡한 감정을 행동으로 분석하고 분출하는 것이겠지만, 무심한 삶에 길드는 것을 거부하는 몸짓일지라도 불륜의 의미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체홉은 불륜을 단순하지 않은 상실된 감정의 충족을 찾는 행위 중 하나로 표현했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 되어 엄정한 일상을 일탈하는 방법, 즉, 독특한 자기 생활을 중시하고 다양한 자기 감성을 값싼 감상주의에 팔지 않으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라고 말이다. 매우 일방적인 배우자(권위주의 찌든 배우자)와의 관계가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된 관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닐 때,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찾다가 만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외도라는 것이다. 특히 여자의 외도는 삶을 억압하는 불합리한 사회 제도에 맞서는 전복이며 감옥 같은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것이며 본능과 정신 사이에서 진동하는 무수한 자아라는 것이다.

산책이나 여행, 일상적인 잡담을 포함한 대화, 아픈 몸과 마음을 읽은 것 등, 소통하기를 원하는 아내와 소통이 무엇인지 모르는 남편,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남편과의 평행선 같은 관계는 여자를 고립시키고 여자의 독백만 무성하게 만든다. 마치 매일 읊조리는 주기도문같이 똑같은 순서로 웅얼거림이 지겨워지는 것을 견딜 수 없을 때, 여자라는 단단한 제약이나 굴레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칠흑같이 컴컴한 현실을 두려워하면서도 통과하고자 카오스의 세계를 가로질러 가려는 의지는 불안정하고 약한 신경증은 아닌 것이다.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에 등장인물은 대부분 여성이다. 고압적인 남편과 사는 것이 외로운 여자, 남편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여자, 남편만 바라보는 여자, 사치스러운 여자, 지나치게 지적이어서 남편의 말문을 막는 여자, 욕망에 솔직한 여자, 욕망에 내숭 떠는 여자 등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속적인 어떤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외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 운명일지 모른다.

삼십 년간 부부들이 겪는 갈등과 그 갈등의 원인을 찾아 진정한 부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연구한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존 그레이, 동녘, 2021)에서 책 제목이 암시하듯, 남자와 여자는 다른 행성에 사는 다른 생명체라는 주장이 뻔히 읽힌다. 다른 생명의 결합은 신비로운 일이다. 신비는 흔하지 않은 일이니, 그 흔하지 않은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삶이다. 아마, 매일 생명이 태어나듯이, 매일 누군가가 결혼한다. 매일 일어나는 일에서 각기 다른 특성으로 충돌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이처럼 인간은 미확인 비행물체가 아닌, 확인할 수 있는 다른 행성의 생명체와 가슴 떨리는 조우가 충돌로 변화하면서 마모하지 않는 고독한 마술에 젖어든다.

세상이 달라지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와 결혼에 대한 관점도 변화를 겪는다. 결혼은 행복을 전제로 하지만, 불안을 담보로 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불안이라면, 불안은 위험을 가장한 모험일 수 있다. 모험은 위험할수록 짜릿하니까. 이 위험한 모험이 결혼이라면, 결혼이 추구하는 행복은 대단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결혼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인 것처럼, 결혼을 해야만 하는 목표도 다양하다. 또 이유가 불확실하고 불충분한 결혼도 생각보다 많다. 결혼해야 하는 이유와 목표가 다양하듯이 결혼에 대한 회의와 후회도 다양하다. 쫓기듯 결혼했다는 이들도 있고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했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는 언제든지 올 수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자기를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체홉이 여자의 특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현실을 확대하고 현실을 재해석하는 고독한 인간이 부리는 마술에 빠져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창조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생성과 소멸은 고요한 낙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과 그 후의 삶이 다르고 출산 전과 후가 다른 것처럼,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사실적인 삶을 허구적인 삶으로 각색하는 묘미가 있다. 사라지는 것 뒤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인간이 아는 감각, 인간만의 욕망에 대한 표현은 유효하지 싶다.

실제와 환상을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로 해석하는 일은 자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고독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끔찍스러운 일이 사실은 그다지 끔찍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에게 맞는 부드러우면서도 강고한 아름다움을 찾을지 모른다. 인간은 사랑과 외로움, 욕망과 고독을 느끼는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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