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e

by 남쪽맑은물

편해영의 소설 『홀』(문학과지성사, 2016)에 구덩이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식물인간이 된 사위를 돌보는 장모다. 결혼 후, 서로 단점만 보이기 시작한 딸과 사위는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에서 교통사고로 딸은 죽고 사위는 살아서 돌아온다. 죽은 딸 일기장을 본 장모. 과연 장모는 일기장에서 무엇을 알았을까. 사위를 바라보는 장모의 시선에 긴장감이 흐른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위의 장례식이라도 치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일까. 구멍투성이 삶이 그럭저럭 굴어가는 것이 인생이라 한다면, 점점 커지는 구멍 속에 이물스러운 것을 빠트리는 것도 인생일 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위. 매일 조금씩 땅을 파는 장모. 장모는 왜 구멍을 깊고 크게 만드는 것일까. 사위를 빠트릴까, 아니면 스스로 빠질까, 아니면 다시 메울까.


모르는 사이에 아직도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억울함,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쌓이는 불행,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는 중요한 사실들, 모르는 사이에 제멋대로 자라나는 증오, 모르는 사이에 눈 감으면 목 조르는 악몽, 모르는 사이에 차박차박 사라지는 상상력, 모르는 사이에 전쟁을 일삼은 잘못된 믿음에 대한 두려움, 모르는 사이에 도망칠 수 없는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세상은 구덩이 천지일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구멍이 자라나서 구덩이가 되는 것은 재앙일까. 구멍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구멍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오히려 구덩이를 파는 행위일까. 모르는 사이에 구멍이 구덩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성공, 실패, 호황, 불황, 취업, 실업 등등은 강제당하는 개인과 집단이 뿜어내는 불안에서 유발된 결과물이다. 다른 이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시달리는 자아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실패에서 생긴 굴욕감이 성공한 이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시선에는 흔들리는 불안이 있다. 그러다 자기를 부끄러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비통한 마음이 불안을 더욱 흔들어댄다. 불안으로 멍한 가슴을 두드리는 상황이 지속하면 흩어지는 공허에 풍덩,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생명이 흔적을 남기듯이 구덩이도 흔적이다. 죽음도 삶의 형태인 것을 생각해 보면, 진귀한 그 무엇은 존엄과 존중한 모든 것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에서 증오가 생기기 시작하면 불안한 마음이 활활 타오른다. 추락한 자존심은 모욕이 되어 다른 사람에 대한 선한 반응이 중단되면서 민감한 문제가 된다. 오로지 어떤 식이든지 자기에 대한 관심만 중요하게 되면서, 다른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면서 남들이 보내는 반응에 흔들린다. 흔들리고 흔들리다 아무도 없는 곳에 파묻히고 싶어진다. 아니면 파묻고 싶거나.

무얼 해도 생기는 삶의 구멍들. 사랑이 없으면 자기 인격에 대한 신뢰가 희미해지는데, 희미해진 인격으로 살아갈 힘이 없을 때, 혼란스럽다. 어쩌면 물렁물렁한 자아는 바람이 빠지고 있는 풍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구덩이에 들어가고 싶은 것은 사회 지위와 인간 가치를 분리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소극적 행위, 즉, 외로운 저항이 아닌가 싶다. 편견을 드러내는 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자아 본질만으로 편안할 수 있는 곳이 구덩이뿐이라면,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겠는가. 복잡한 관계성에서 일탈하는 외로움이 오히려 편할 때가 있는 것처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모두 놓고 안착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면, 자기만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가 꼭 무덤만은 아닐 것이다. 구덩이는 두려움의 근원인 불안을 떨쳐버리고, 속물근성으로 순환하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소일거리로 차별하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상대할 필요 없이, 상징도 없는 중요성을 붙잡고 있는 현실이라는 형벌에서 탈출하게 도와줄지 모른다. 속물에 물들어가는 자본에 깃든 정신을 자본과 상관없는 정신으로 메울 구덩이가 존재하다면 궁핍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불안이 조금은 사라질지 모른다.

그림책 『구덩이』(다나카와 순타로, 북뱅크)에서는 구덩이를 파는 행위가 죽음을 상징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이건 내 구덩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심심해서 구덩이를 파는 어린이. 여러 사람이 왜 구덩이를 파는지 물어본다. 어린이는 이런저런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덩이를 판다. 깊이, 더 깊이. 자기가 판 구덩이에 어린이는 쏙, 들어간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가 왜 그곳에 있느냐고 물어도 구덩이에 앉아만 있다. 가만히 구덩이 안에서 바라본 하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파랗고 높아 보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린이는 천천히 구덩이를 나오고 천천히 구덩이를 메운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 어린이는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 듯하다. 무용해 보이는 일이 누구에겐 사랑하는 일인 것처럼, 경험이란 목적 없는 생각이 행동이 될 때 자족하는 기분이 있지 않은가.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자기만이 느끼는 충만함이 있지 않은가.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일, 편안한 휴식처를 직접 발견하는 일,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하는 일, 깊고 깊은 심연으로 빠지는 일이란, 어린이가 구덩이를 파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명성이나 경쟁, 정신이나 이상, 유혹이나 절제와 같은 목적과 상관없는 그 무엇이 필요할 때, 반복된 행동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 하늘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흙구덩이에서 올라오는 흙냄새는 오장육부에 넣어두었던 삶과 죽음이 섞인 친밀한 냄새다. 마치 지렁이 오줌같이 독이 없어 깨끗한 냄새. 무얼 해도 흔적을 남기는 구멍, 구멍이 자라서 구덩이가 된다 해도, 구덩이로 숨거나 사라지는 그 무엇들은, 조용하게 다시 나타나는 삶과 미세하게 잦아드는 죽음이 아닐까.

이처럼,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있고 구덩이를 덮는 사람이 있다. 불온한 해방감처럼, 흙냄새에 홀려 구덩이를 만들면 무덤이 된다. 제 무덤을 제가 판다 해도 덮어주는 이가 없으면, 구덩이를 메우지 않으면 구멍으로 남는다. 세월이 흐르면 구덩이가 메워지겠지만, 구덩이에서 안온함을 느끼게 되면 저절로 구덩이에서 나오게 되지 않을까. 구덩이 밖이 궁금해져서. 구덩이가 만들어지면 누워야 할 것 같지만, 누워봐야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다 구덩이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구덩이에 누워 하늘을 보면 더 하늘이 푸른 것처럼, 푸른 하늘을 향해 몸을 일으키고 손을 내밀지 않을까. 누군가가 그 손을 잡아준다면, 구덩이를 나와 흙을 툭툭, 털어내며 제 갈 길을 가지 않을까. 또 다른 자기를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면서 익숙한 길을 중얼거리며 걷지 않을까.

구멍투성이인 삶에서 어떤 구멍은 구덩이가 된다. 구덩이가 무덤이 되기도 하고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삶에서 죽음과 같은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구덩이라면, 그곳에서 잠을 자야 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껴고 푸른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구멍들의 환호성에 화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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