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에서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글에서 사회 구성으로서 인격을 형성하는 데 타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타인은 눈앞에 보이는 존재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관념을 채워 하나의 모습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이 그 존재의 전체라고 표현한다는 것, 어쩌면, ‘나’라는 인물이란, 타인이 채운 관념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나’라는 주체 의식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이 생긴다.
푸르스트의 글을 읽으면서 이우환 작가의 작품 「관계망-길모퉁이」를 생각한다.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몇 번 보았는데, 관계성이 없는 철과 돌과 유리라는 물질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궁금해서 꽤 오랜 시간을 그의 작품 앞에서 서성이던 기억이 있다.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품을 보면서 어쩌면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는 관계들을 생각하면서 내 안에 있는 불안 요소를 만지작 거리던 기억이. 그러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가 불안한 관계를 떠나서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향하는 마음이 아닐까, 오히려 나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불편하다고 느껴질 때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그러다가 아주 낯선 여행에서 불안함보다는 차분한 감상에 젖는 옅은 즐거움을 발견하고픈 것이 아닐까, 말끔하게 단장한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 꾸밈없는 것 같은 나를 조응하고픈 마음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던 기억이.
이우환 작가의 작품은 외부 혹은 타자와 만나기 위해 외부와 직접 부딪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전시 설명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품의 의도를 알게 되니 작품에서 더 깊은 무엇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그것은 아마도 오히려 자아가 부서질수록, 외부와 부대낄수록 살아있는 자아를 느낄 수 있다는 역설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음을 붙들고 부서지고 부대낀 경험이 고통이고 자기 검열이지만, 종국에는 고통과 연결된 고리에서 격상하는 자아를 만난다는 사유의 끝이 아닐지, 돌과 철판 그리고 돌과 유리가 만난 것처럼 적극적인 외부 간섭이나 방해가 자아를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는 것은 아닐지라고. 그것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모습일 거라는 논리에 이르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질적인 물질과 물질의 관계에서‘나’란 존재가 형성하듯이, 나를 구성하는 주체 의식도 나의 의도와 다른, 타인의 관념에 의해 이리저리 조율하는 것이라는 논리에서 타자를 자연으로 눈을 돌리면, 생각이 많아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마치 자연이라는 낱말이 지닌 의미를 분석하는 과정 하나쯤으로 자연을 생각하거나 마치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에서 자연을 들러리로만 생각하는 부끄러움 같은 것이 그렇다. 이렇게 자연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절망 비슷한 낭패감을 외면할 수 없을 때, 존재에 대한 관계를 생각한다.
푸르스트의 글에서 사회를 자연으로 치환하고 타인을 자연으로 대입하면, ‘나’라는 주체 의식은 자연과 떨어질 수 없다. 자연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외양을 입힐 것이고, 그 사람 내면에는 자연에 스며 있는 관념으로 채워진 모습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니까. 물론, 자연이 항상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을 건드리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지는 자연 현상처럼, 자연도 인간을 건드릴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의 사회 관념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려하는 미래는 조금은 덜 불안할 수도 있다. 자연은 불안의 대치어가 아니니까.
자기를 나타내는 행동에는 사회 관념이 스며있다. 사회에서 허용하는 가치를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개인 성향이 형성된다. 개인이 표현하는 가치는 주변 환경과 연결되어 개인이 속한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환대로 기억하는 특별함이 개인의 주체성을 형성한다. 그런 기억은 삶에 좋은 영향을 준다. 이 모든 것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의한 것이고, 환경은 우연히 형성되기도 하지만, 자기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모든 환경은 자기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인격을 위해 환경을 설정할 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 자연에 뿌리를 두지 않은 개념은 위험하다. 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면, 낭패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작품 「관계망-길모퉁이」처럼 서로 부대낄수록 살아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파괴한다. 개인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 전체와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존재하기에 파괴력으로 변질할 자연(自然)스럽지 않은 일은 멈추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 전달되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면, 자연과 소통하는 언어를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 관계는 위험하다. 자연과 교감하는 시선은 어떤 것인가. 자연과 공생하는 삶은 무엇인가. 자연은 아프다고 하는데 인간은 점점 연약해지는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관계망은 산산이 부서진다.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은 여러 관계망에서 사회적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
‘나’라는 인격은 자연이 채운 관념의 증거다.
삶의 기쁨을 인간관계에서만 찾으려면 불행하다. 그래서 꿈을 해몽하고 자연에 머무는 정령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태양 같은 꿈, 태양에 깃든 정령. 꿈에 나타난 태양 빛이나 ‘나’를 향한 태양 빛은 자연스러운 일일 뿐인데도 어떤 존재의 뜻에 따라 빛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기도 한다. 그것은 불행하지 않으려는 애씀이다. 그러다 보면 자기 존재를 지극히 깎아내리거나 무력하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기 존재의 소중한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점점 커진다. 비록 거친 삶일지라도 매일 떠오르는 태양 같은 생명의 불꽃은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친숙한 불안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나’가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이유다.
타인이 채운 관념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나’는 자연에서 만들어지는 ‘나’를 외면할 수 없다. 철과 돌과 유리뿐만 아니라, 산에서 만나는 나무와 풀, 짐승과 새, 골짜기와 폭포, 팔락이며 떨어지는 눈송이와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폭우 등등, 우주 최고 가치인 자연과 더불어 ‘나는 나’라는 주체 의식은 당당하게 존재한다. 존엄한 가치를 위해, 살아있는 생명을 위해 서로 다른 생각이나 이념이 부대끼면서 생성하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자연이 채운 관념으로 ‘나’의 존재는 더욱 단단해지고 ‘나는 나’라는 주체 의식은 자연이 만들어낸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굳건하다.
거품처럼 몽글거리는 타인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은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길을 향하는 발걸음이다. 그러다 또 다른 모퉁이를 돌아 물안개가 퍼져있는 길에서도 타인을 만난다. 사방으로 연결되는 길과 길에서 만나는 타인이 자연의 일부이기에 ‘나’는 예상하지 못한 관계로 형성된 창조물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