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질을 한다. 왼 손을 바닥에 펴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닦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걸레질이다. 거실바닥은 여러 종류의 나뭇결무늬다. 이런 모양이었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옹이 진 나무의 굵은 선을 따라 고적함을 느끼게 하는 빈 공간, 가벼운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나뭇잎들, 달빛에 비친 빗살무늬 선들, 창호지를 뚫고 지나가려는 햇살 강한 사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른 고추를 다듬고 남겨진 꽁다리나 씨, 고추 부스러기를 치우려 청소기를 돌리려다 그만둔다. 고추씨와 다른 이물질을 청소하는데 청소기보다는 빗자루가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빗자루로 이것들을 가지런히 한 곳으로 모은다. 먼지와 머리카락 그리고 사람과 인연이 되었지만 이제는 떨어져 버린 작은 입자들도 함께. 모여 있는 것들을 쓰레받기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바닥을 닦으려 스팀청소기를 만지다가 번거롭다는 생각에 걸레를 찾는다. 고추씨가 남아 있을지 모르니 손걸레로 닦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어린 시절에 걸레는 항상 방이나 마루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난방이 풍요롭지 않은 그 시절, 특히 겨울에는 걸레가 얼어버렸다. 나는 걸레질하는 것을 싫어했는데(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등을 구부리고 무릎걸음을 해야 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더구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떤가(그래서 스팀로봇청소기가 발명되었다). 청소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걸레질만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빗자루가 마저 해결하지 못한 삶의 조각들을 마무리해 주는 역할이 걸레질이라면,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겨울에는 마루 한쪽에 있는 걸레가 얼어서 얼음 조각품으로 자리하곤 했다. 꽈배기처럼 비틀어진 모습으로 얼어붙어 있던 걸레는 매일 다른 일상을 드러냈다. 그 비틀림은 같은 방향이면서도 다른 질감을 품고 있었으니. 그 딱딱한 형체는 어김없이 스르르 녹아 다시 걸레 역할을 했다. 언제라도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연성이 우리의 다양한 삶을 말해주는 듯, 가족 일상에서 항상 뒷전에 있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 걸레였다. 그럼에도 구석진 자리를 굳세게 지키고 있었으니 그 무던함이 시들하다가도 정신을 뻔쩍이게 하는 삶의 풍경이었다.
걸레를 잡고 고추를 다듬던 언저리를 닦는다. 그런데 이 일이 내면에 있는 알 수 없는 시근시근한 미지의 형상을 건드린다. 내 일상을 지탱하는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나. 거실 바닥의 무늬와 마음 바닥의 무늬가 닮은 부분은 무엇인지를 더듬어 본다. 그리고 손에 잡혀 있는 걸레가 어떤 흔적이라도 없앨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이 어떤 결의를 품고 있는 의식으로 다가온다.
시선을 바꾸니, 텔레비전 카만 화면에 붙어 있는 먼지가 보이고 텔레비전을 지탱하고 있는 장식장 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 먼지는 일상의 잔해들이구나. 반복적으로 일어난 일상의 의미가 먼지구나라는 생각에 걸레로 먼지를 닦으니 감쪽같이 사라진다. 흔적을 없애는 기분이 비밀스러워 저르르한 소름을 느낀다. 걸레를 들어보니 없어졌을 거로 생각한 먼지가 짓이겨져 있다. 솜뭉치 같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누르니 꾹꾹 누른 식빵 조각처럼 보인다. 지나가버린 삶의 조각들이 작아지고, 줄어들고, 납작해진 것처럼. 조금 축축한 먼지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거실 바닥을 닦는다.
앞을 보는 삶, 다시 말하면, 앞만 보는 삶에 길들여진 것은 복잡한 현실에 적응한 결과일 것이다. 바로 앞에 일어날 일에 주눅 들고 지나간 일에 후회하는 현상이 증폭하고 그런 비슷한 생각이 확산하면 할수록 비례적으로 우울해지는 일상. 고추씨처럼 점점이 떠오르는 우울의 근원을 먼지 닦듯이 걸레로 닦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걸레질은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일이지만, 의식세계에 새로움으로 튕겨오는 어떤 의미다.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들, 방 한쪽에 뒤틀려 있는 관계들, 아직도 냄새나는 사건들일지라도 그것들은 삶이 갖고 있는 먼지들이라는 생각이다. 걸레로 그것들을 닦을 수 있다면, 설사 시커멓게 그을린 우울의 색채로 다시 자아를 흔든다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시답잖은 감정으로 반죽된 오물을 닦기 위해 자세히 보아야 하는 것처럼, 우울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은 소중하다. 불안한 일상일지라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되곤 한다. 걸레를 손에 쥐고 있는 순간은 자기 바닥에 있는 오염을 닦으려는 결심이니까.
거실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다채로운 무늬는 생각이라는 혈관으로 흐르는 이야기이며, 좋은 곳에 당도하기 위해 알맞게 흐르는 인생의 일부다. 집안에 있는 가구 위에 쌓여 있거나 가구 옆에 붙어 있는 먼지도 아우성치고 배반하는 순간이 있다. 어린이가 울어도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숨 막히고 가슴 내려앉는 기억이 사라지지 않지만, 축소할 수 있다는 마음이 싹이 트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무릎 꿇고 바닥을 닦는 이 시간이 필연적 것은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을 지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리라.
냄새나고 습기를 먹고 있는 것이 숙명이라 생각했던 걸레는 마음 바닥에 엉켜있는 던적스럽던 우울한 일상을 날려주는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어법의 묘미를 준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걸레를 너무 찬밥취급했으니. 어린 시절 겨울날, 묘한 모양으로 얼어있던 걸레 모형이 구석으로부터의 예술품으로 느껴지는 것과 연결된다. 물론 물티슈의 등장으로 걸레가 거의 사라졌지만, 걸레는 우울의 냄새를 알차리는 마법사 같다는 상상은 더러운 것을 없애주는 신기한 것들의 모든 것이다.
요즘은 입식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바닥을 자세히 보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오염 물질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둘러 붙어 있는 오염 자국을 싹싹 닦을 수 있는 걸레가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벌떡벌떡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으로 혼란할 때, 인생이 겨울밤 같아도 그리 어둡거나 춥지 않은 것은 걸레를 잡을 수 있는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