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유도 도전기 1
이웃 동네 서점에서 평소 좋아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강의가 열린다고 해서 주제도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신청했다. 팬심과 기대감으로 꽉 채워 자리에 앉아 열심히 귀기울였다. '공부'와 '쓰기'에 관해 이야기하시려 했으나 시간이 부족해 공부에 관한 이야기로만 두 시간여를 꽉 채워 애기하셨다. 학교에서 배우는 학업으로써의 공부가 아닌 몸으로 익혀 평생 지속되는 공부에 관해 강조하시면서 하신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쳤다.
"부모가 '공부해라'라고 말하는 애는 공부 시키면 안돼요."
어쩔 수 없이 우리 집 16살, 고등 1학년 큰아들이 떠올랐다. 입시공부가 우리 아이에게 정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성적표로, 태도로, 눈빛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면 얼마나 어려울지 알고 있으니까, 살면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설득하고 강요해서 끌고가려고 했다. 부디 대학이라는 문턱을 넘어가기를 바랬다.
하지만 말을 물가까지 데려갈 순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고, 책상앞에 억지로 앉혀놓을 순 있어도 공부를 하게 할 순 없었다. 기초도 없고 의지도 없는 아이를 인강과 자습만으로 어떻게 공부를 시킬 수 있을까. 때려서라도 학원을 등록하고 과외를 붙였어야 했다고, 코로나로 게임만 하고 히키코모리처럼 들어앉아 있는 아이를 보며 후회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늦었다. 다른 아이들은 트랙을 10바퀴 돌아 결승을 향해 달려갈 때, 한 바퀴도 돌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원인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중학교 시절을 날린 탓에 기초가 부족하니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계속 결손이 누적됐다. 거기에 게임과 유튜브에 길들여져 집중을 못하고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조차도 모르는 아이에게 입시공부는 너무 높은 벽, 쳐다보기도 힘든 벽일것이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어서 100키로가 넘게 불어버린 체중, 여드름이 부끄러워 코로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어도 마스크를 벗지 않고 어깨를 구부린 채 걷는 아이. 친구는 없어도 된다며 사회적인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는 아이에게 성적으로 자존감을 높여주고 습관을 잡아주려는 건 맞지 않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건강하고 다부진 몸, 몸을 움직여서 얻는 향상심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탄력성을 키워주는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권도는 어린 아이들 중심의 커리큘럼이라 하고 싶지 않아했고, 중학생때 3개월 다니던 복싱은 관장님의 무성의함에 아이만 상처받은 전적이 있었다. 그때 떠오른 게 유도였다. 우선 덩치나 뼈대가 아까웠고 수 만 번 넘어졌다 일어서는 경험, 상대와 직접 옷깃을 잡고 부딪히는 경험이 아이에게 적극성을 길러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스스로 생각해도 근거없는 확신이 들어 무조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유도장을 검색했다. 운명인걸까? 버스로 10분 거리에 마침 유도장이 딱 한 군데 있었다. 그곳 말고는 한 시간 이내에 유도장이 없다.
검색하고나서 그곳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퇴근하자마자 무조건 아이를 닥달해서 데리고 나갔다. 안가겠다고 버티는 아이를 내 평생 가장 단호한 태도로 끌고갔다.
"엄마, 도대체 무슨 영상을 보고 삘을 받은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안할거에요. 안해요. 절대로 안해요."
아이는 얼굴을 굳히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엄마와 함께 유도장 앞까지 갔다.
유도장 문을 열자, 특유의 퀴퀴한 땀냄새가 느껴졌다. 아이들 어릴 때 태권도장에서 맡아보고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냄새였다. 관장님은 안 계셨고 지도하는 사범님만 계셨다. 안 들어간다고 뒤로 빼는 아이를 다그치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쪽팔림과 민망함,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얼굴 굳혀가며 아이와 사범님 앞에서 실갱이를 벌였다.
"엄마가 뭐라고 해도 안한다니까요."
"일주일에 세 번만 가도 되니까 무조건 해. 바로 등록할거야. 사범님, 원서 주세요. 쓸게요."
관장님이었으면 뭐라도 말을 거들며 설득하셨을텐데, 사범님이라서 그런지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고 최소한의 설명만 해주셨다. 직접 이름 쓰고 서명하라고 펜을 주는데 아이가 외면하면서 안하겠다고 버텼다.
"쓰세요."
"써."
"쓰라고 했지!"
앞에 앉은 사범님은 눈 둘 곳을 몰라하는데, 엄마는 목소리 굳혀가며 강요했고, 결국 아이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지렁이글씨로 적어냈다.
어찌나 땀이 나던지. 간신히 등록을 마치고 나니 7시. 8시부터 훈련이라고 해서 오늘 바로 시작하겠다고 하고 입금까지 끝냈다. 잠시 후에 뵙겠다고 인사하고 아이와 함께 문을 닫고 나서는데, 겨드랑이에 땀이 흥건했다.
나와서 간단히 아이가 좋아하는걸로 저녁을 먹이고 잠시 소화시킬겸 주변 산책을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계속 쫑알대며 불편을 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 안도했다. 엄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체중도 한참 더 나가면서, 힘으로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면서, 엄마의 강권에 끌려오다니. 속으로 정말 착한 아이라고, 정말 순한 아이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시간이 되어 아이는 유도장으로 들어가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긴장도 풀고 아이가 어떻게 할 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 시간인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아이가 보내고 있을 시간을 상상해 보며 커피를 마셨다. 갑작스런 경험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을 지 조금은 걱정도 됐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카톡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들어왔다. 엄마의 걱정과 기대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아이는 싱글벙글 연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엄마, 오늘 처음 하는건데, 엄청 재밌었어."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몸의 어디를 어떻게 움직여서 무슨 동작을 했고 어떤 게임을 했는지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세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좀 나가서 얘기하자. 세상에 땀 좀 봐."
정말 간만에 땀이 흐르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목마를 아이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사주고 밤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가는 내내 아이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이는 즐겁게 유도하러 다녀왔고, 밤마다 자신이 배운 동작들을 동생과 엄마에게 설명하는 걸로 모자라 직접 보여준다며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근육통과 다리저림으로 엄살은 있는대로 부려대면서도 빠지지 않고 다닌지 이제 2주 째가 된다. 첫 주는 다녀와서 씻고 바로 잤다. 공부고 뭐고 무조건 자겠다는 아이가 오히려 대견스러웠다. 2주째가 되자 다녀와서 책을 좀 볼 여유를 찾았다. 그런다고 학교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2주에 한 번 있다는 금요합동훈련이란다. 다른 유도장 훈련생들과 같이 모여서 하는데, 자기는 초보기도 하고 사람 많은 곳은 부담스러워서 안가겠다고 미리 말했단다. 오늘은 무조건 쉬겠다고 미리 선언했다나.
그래, 그렇게 한 달씩 한 달씩, 꾸준히 운동하고, 그 시간들이 쌓여서 일 년, 또 일 년 차근차근 성장할 수 있을거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덧붙여 이 엄마도 꾸준히 유도소년성장기를 적어나가고 싶다. (꼴통) 고딩의 유도 도전기, 이제 막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