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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11. 2023

다정이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을까


부끄러움 둘 : 생리현상과 관련된 수치심은 때로 파괴적이다.


지난 가을, 지역의 도서관에서 소설가 김연수새소설 낭독회가 열렸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미발표 단편을 직접 읽어주는 자리라니, 주저하지 않고 바로 신청을 했다.


그리고 대망의 토요일. 일찌감치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미리 점심도 실컷 먹고 커피도 잔뜩 마셨다. 배가 고프면 타인의 이야기가 잘 안 들리는 법이니까.  


도서관 사서의 작가 소개가 끝나고 작가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읽어주시자 는 내 마음도 흔들렸다. 소설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데 몸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뱃속에 발길질하는 태아가 있는 것처럼 점차 격렬한 움직임이 느껴지며 옆 사람에게 들릴까 걱정될 정도로 꾸르륵 거리는 소리마저 났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대장의 꿈틀거림! 가스가 차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발사할 순 없다, 최선을 다해 항문에 힘을 주고 버텨야했다.


 소설의 감동적인 대목 사이사이로 미세하게 근육을 조정하며 힘조절에 성공했다. 뱃속에서 난리가 나고 있었지만 감동과 몰입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훌륭하다 나 자신.


작가님의 낭독이 끝나고 자신의 소설이 과거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의 다정함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에선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현실을 뛰어넘어 이유없는 다정함으로 미래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떠올려보니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작가님의 다음 소설을 같이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


두 편의 소설 낭독과 작가님의 이야기가 끝난 후 질문과 답변 시간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팬심과 존경심을 담아 질문을 던졌고 작가님은 섬세하게 답변을 고르셨다. 늦가을 감성에 다정함을 더하고 감동과 아름다움까지 담은 맑은 차 한 잔 마신 것 같은 자리였다. 그동안에도 눈치없는 대장은 연동운동을 계속하며 차곡차곡 가스를 만들어냈다.


드디어 준비된 시간이 모두 끝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가스가 폭발할것처럼 가득찼다.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작가님께 사인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는데 피난민 틈에서 헤어진 혈육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오로지 나만 재빨리 뒤로 달려나갔다. 외로운 엑소더스, 서둘러야했다.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열린 칸을 찾았다. 문을 잠그고 자리에 앉자마자 미친듯이 두 시간 동안 쌓아놓은 가스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뿌아아아아아아파아아아아아아아휴푸르르르하아아아아아으응"

끊길듯 끊길 듯 이어지는 과격한 소리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공중화장실인데, 이렇게 큰소리를 내도 되는걸까 걱정될 정도의 데시벨을 기록하며 기나긴 배출을 끝내고 심신에 평화가 찾아오려던 순간, 난데없이 말소리가 들렸다.


"저.......거기 휴지 없던데...."

응? 무슨 얘기지? 내게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닫는데 3.5초 쯤 걸린 것 같다. 아! 이해의 순간 발 밑으로 옆 칸에서 내민 손이 보였다.

"이거 쓰세요."

손바닥 위에 둘둘둘둘 가득 쌓인 휴지를 본 순간, 머릿속에서 고등학교 시절 외웠던 시 한 구절이 휘몰아쳤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어쩌고 저쩌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아아 누구던가.....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랬다, 나의 우렁찬 아우성을 듣고 큰 일을 치루는거라 짐작한 옆 칸의 누군가가, 그 곳에 휴지가 없음을 알기에 어려움에 처했을 이를 위해 자기 칸의 휴지를 뜯어 건내준 것이었다.

"어..어머, 감사합니다. 오호호호호호"

무안함과 민망함을 웃음소리로 덮으면서 휴지를 받았다. 작은 일 뒷처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많은, 큰 일 치르기에도 넉넉한 양의 휴지였다.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서둘러 일어났다. 혹여 옆칸에서 건너온 손의 주인공을 만날세라 얼른 손을 씻고 뛰듯이 화장실을 벗어났다. 때로 타인에게 목격당한 생리현상은 파괴적인 수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도망치게 만든다. 우아하게 소설 낭독을 듣고 화장실에 가서 미친듯이 방구를 뀌는 사람, 나야 나. 으악!!!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심스레 건내오던 목소리가 계속 생각났다.


그 분은 어떤 분이었을까? 나와 같은 강연을 들었을까? 그래서 이유없는 다정함을 베풀었을까?


그때는 마냥 민망하고 창피했는데, 떠올릴수록 내 부끄러움보다 누군가의 다정함이 더 마음에 남았다. 아무 이유없는 다정함, 타인의 위기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누군가의 세심한 호의.

덕에 내 부끄러운 기억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다. 진창길을 덮은 하얀 눈처럼 말이다. 부끄러움은 다정함이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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