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Dec 18. 2023

그때 내 엉덩이에 닿았던 것은

오래전, 아마도 여덟살 쯤으로 기억한다. 5층짜리 주공아파트 단지 안에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놀 곳이 많았다. 어린아이부터 큰아이들까지 항상 아이들로 가득한 놀이터와 어딘가 위험하고 으슥한 공터까지, 아이들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서로 통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놀곤했다. '거기'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아파트 어느 동 구석에 돌벤치 서너 개를 둔 작은 휴식 공간, 조경수가 울타리를 두르고 지붕에는 등나무가 덮여있어 오붓하지만 어딘가 으슥한, 그래서 묘하게 아지트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밤에는 아저씨들이 앉아서 담배를 태웠으며, 낮에는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이 술래잡기와 얼음땡을 하며 놀던 곳. 


그 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또래 여자아이들 너댓명이 같이 모여 돌벤치 위를 건너 뛰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원래 같이 놀던 친한 친구들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냥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고, 그 시절 아이들에겐 그걸로 같이 놀기 충분했으니까. 높게 둘러싼 나무들 덕에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 한낮의 햇살을 차단한 비밀스런 공간, 마침 어른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땀흘리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들어왔다.


처음보는 아저씨였다. 키가 컸고, 허여멀건한 피부에 코가 길었다. 눈에 검은자위가 빛을 흡수하는 느낌, 투명한 생기가 보이지 않는 느낌이라 어딘가 어색한 인상이었다. 머리카락이 약간 길었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놀고 있던 우리에게 다가와 아저씨가 말을 건냈다. 어떤 말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누구에게 말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한다. 우리 중 가장 예쁜 아이였다. 긴 파마머리를 양갈래로 높이 묶고 레이스가 붙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머리모양과 옷을 부러워했다. 어른들이 칭찬하고 또래들도 귀여워하는 아이니, 낯선 아저씨라도 그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예쁘다, 이리 와 볼래, 정도로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무언가 기분이 상한 듯, 아저씨 때문에 불쾌해졌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싫다면서 그냥 나가버렸다. 어린 마음에도 콧대높은 공주님 같다고 생각했다. 어딜 감히. 


놀이의 중심이었던 아이가 떠나자 같이 놀던 아이들도 따라서 아지트를 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아지트 안에는 더 놀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미적거리던 나와 아저씨 둘만 남게 되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도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다정하게. 안녕, 이리 와 볼래.


 왜그랬을까. 강압적이거나 무서운 말투였다면 도망쳤을까. 친근하고 다정한 말투라서, 예쁘지 않은 내게 보여주는 관심이 기꺼워서, 낯설지만 나에게 호의를 나타내는 어른이 있다는게 기뻐서, 나도 누군가에게 선택당했다는게 뿌듯해서. 그 모든게 다 뒤섞여서 나는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나를 들어올렸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몇 살이니, 어디 사니, 이름은 뭐니 같이 통상적으로 처음 보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할 법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답을 하는데, 입고 있던 원피스 아래로 무언가 따뜻하지만 물컹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불편하고 불쾌했다. 어딘가 이상했다. 본능적으로 아저씨 품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했다. 벌떡 일어났다.

 "나, 갈래." 

그리고 등나무와 조경수로 뒤덮인 아지트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뛰어갔다. 그래봐야 몇 발짝이었을 것이다. 후다닥 뛰어가다 입구에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왜였을가? 아저씨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었고, 앉은 자세 그대로 바지를, 추켜 올렸다. 고를개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저씨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아저씨가 말했다. "에이 씨"


그곳에서 내게 있었던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저 사람이 누군인지 같은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빨리 그 곳을 벗어나야하고, 저 곳은 좋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입구에서 돌아본 아지트의 모습이 지금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어둡고 그늘 진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옷을 정리하던 아저씨.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왠지 기분 좋지 않은 일,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말하면 안될거라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부끄러웠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고, 이내 지워버렸다. 하지만 다시는 그 아지트에서 놀지 않았고, 이후로 두 번 다시 그 아저씨를 본 기억은 없다.


그때, 내게 닿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거의 십여 년이 흘러서야 그 뜨듯하고 물컹한 것의 '정체'를 깨달았고, 내가 당한 것이 유아성추행이었다는 것을, 분명한 폭력이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그보다 또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는 왜 부모님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부끄럽고 무서운 기억으로 묻어뒀던 것일까. 세상의 다른 수 많은 여자들처럼, 내 잘못도, 내 실수도 아닌데. 무엇이 내 입을 막았을까. 


그 억압과 검열을 이제는 안다. 내 입을 막았던, 내 기억을 닫게했던 보이지 않는 손과 싸워야한다는 것을.

그리고 어린 날의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을 벗겨내려고 노력한 무수히 많은 여자들의 걸음 또한 안다.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간다.

어두운 그늘 속으로 낯선 남자가 들어와서 나를 안아올리려 한다.

나는 크게 외친다.

싫어.

아니, 그것으로 부족하다. 

여기 이 사람이 나를 만지려 했어요.

바깥의 다른 어른들에게 외친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때는 못했던 일. 

지금에라도, 지금에라도. 


이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수치는 내가 아니라 너의 몫이다.

이전 02화 다정이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