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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Feb 02. 2024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내리며

온라인 독서모임으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었다. 하루에 한 두 장씩 읽고 사진을 찍어 카톡방에 간단한 감상과 함께 인증하는 방식이다. 1년 전에 프롤로그만 읽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책을 이 기회에 2주에 걸쳐 완독했다. 차분히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는 진행은 꽤 재밌고 유익했지만 책은 불호였다. 생각난 김에 정리해본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어크로스. 2021)


1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기 시작했다. 작년에 프롤로그만 읽고 못 읽은 책이었다. 철학은 스파보다 헬스장에 더 가깝다는 글귀를 읽고 감탄해서 옮겨적기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그때는 이 책의 질문들이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마침 주말 어머니 제사를 끝내고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게으르게 보낸 다음 날, 이 책 1장을 읽었다. 책은 침대에서 나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며 시작하고 있었다. 맙소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이 무엇일까, 내가 왜 일어나서 침대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읽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침대에서 웅크리고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저자와 딸이 나눈 대화를 읽기 전까지 말이다. “우릴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건 활동이지, 알람시계가 아냐.”라는 열세 살 소녀의 말에 고수를 씹은 듯 입안이 개운해 졌다. 내가 무언가를 해야하는 것은 사명이라는 마르쿠스의 말이 그제사 이해가 되었다. 한 인간으로 의무와 책임도 물론이지만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해 나가서 내 삶을 시작해야한다. 물론 가끔은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쉬겠지만 말이다.


2장.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2장은 소크라테스 이야기였다. 다른 철학서보다 더 쉽고 현실감있게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왜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살았던 내게 어떻게를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질문을 경험하는 삶을 나 역시 경험해보고 싶어져서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사랑이 뭐야? 너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 하고 물어보았다. 물론 나는 에릭 와이너가 아니라서 내 아들은 그의 딸 처럼 현명한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사랑이 사랑이지 뭐.’라고 말하고는 쿨하게 일어서버렸다. 괜찮다. 소크라테스도 말했다. 중요한 것은 성찰하는 삶이라고. 들여다보고,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져보자. 출발은 꽤 괜찮다.


3장. 루소처럼 걷는 법

4장 소로처럼 보는 법


3장 루소, 4장 소로를 읽었다.

저자는 어째서 아우렐리우스와 소크라테스 다음으로 이 둘을 선택했을까? 둘다 걷고 보는 사람이었고, 위선과 모순으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철학자다. 아마 그래서겠지. 철학이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라 모순투성이 인간, 연약한 인간의 몸부림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게 아닐까.

여전히 작가의 유머는 빛이 난다. 대중철학서의 미덕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읽으며 킬킬 대는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 덕에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내게 루소와 소로는(이름도 비슷하다! ) 앞장의 인물들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다음 쇼펜하우어를 기대해본다.


5장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드디어 쇼펜하우어.

오늘도 예스24 주간베스트셀러 1위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다 젊은 세대들 중심으로 쇼펜하우어가 화제다. 쇼펜하우어로 검색하면 무려 170여권의 책이 나온다.  가히 열풍이라 할만하다. 이 시대에 쇼펜하우어가 화두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읽어보았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사는 것은 고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내게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다른 만큼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철학은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단어들의 의미를 재정립하라고 말한다. ‘의지’가 그렇다. 인간으로 지녀야할 덕목으로 알고 있던 의지가 쇼펜하우어를 만나면 달라진다. 의지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해치게 된다니. 의지라는 블랙홀에서 벗어나야 한다니. 그가 말하는 의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내 평생 읽을 것 같지 않지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소개된 첫 문장은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라니. 세계는 우리가 인식할 때만 존재한다는 관념론자들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차분히 글을 읽어가며 저자의 설명을 따라갔다. 하지만 음악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선뜻 공감하기 어려웠다. 예술의 고귀한 목표에 동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챌 만큼의 식견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 매료되었던 쇼펜하우어에 소개하기 위한 도입부로 고사성어 ‘새옹지마’를 설명한 부분은 재미있었다. 동양고전문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지만 서양인에게는 길게 풀어설명해야할 이야기구나 싶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 소개하면서 저자가 음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고 느꼈다. 소음과 음악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면 더 간결하게 설명했어도 됐을텐데. 그래서인지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와닿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에 대해 다른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


6장.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다음에 소개하는 철학자가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라니, 에릭 와이너의 직조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든다. 재기가 느껴진다.

아주아주 오래전,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웠던 ‘아타락시아’에 매료되었다. 모든 고통과 상념이 부재하는 영혼의 평정상태라니, 사춘기 여고생이 빠져들만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 다시 아타락시아를 만났다. 이번에는  어떻게 받아들이게될까?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매우 당연하다. 뇌과학이나 진화심리학의 측면에서보자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부분들에 쾌감을 느껴야했고 점차 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쾌락은 선도 악도 아니고 필요의 문제라는거다. 행복이 공리주의적이라면 쾌락은 좀 더 개인적이다. 나의 만족과 기쁨, 행복을 위해 타인을 침해하지 않는 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비난이 조금 억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챕터의 마지막 저자와 톰의 대화도 인상적이었다. ‘갈망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욕망을 최소화하여 고통을 해결한다.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쾌락의 역설에 희생당하지 않는 것. 쾌락주의를 다시 알게 되었다. 충분히 즐거운 독서였다.


7장.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오래전, 시몬느 뵈이유, 혹은 시몬느 베이유라고 번역된 책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런 종이와 조악한 인쇄질의 책이었지만 꽤나 소중히 간직하며 반복해서 읽었다. 내용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본느 베이유라는 이름의 저자가 쓴 책을 읽는 내가 만족스러워서 그 책을 좋아했다. 흑백으로 실려있는 시몬 베유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지적인 면모가 내게서도 흐르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다시 만난 시몬 베유의 이야기는 새로웠다. 주의력과 관심에 대한 이야기들, 기술이 아니라 정신 상태이며 방향성이라는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그녀가 탈창조라고 불렀다는 이 상태, 자아를 벗겨내는 이 상태는 어떠한 경지인 것일까? 하지만 저자는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안내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여행에 빠져서 자신의 관심을 풀어내는데 더 집중하는 듯 하다. 매우 이기적인 안내자다. 게다가 비약이 심해서 점점 따라가기가 버겁다. 그래서 이 챕터의 마지막 문단의 결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가 잃어버린 공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의 욕망인가? 목표인가? 아직은 많이 낯설다.


8장. 간디처럼 싸우는 법


8장의 제목은 간디처럼 싸우는 법이다. 간디는 철학과 사상가보다는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더 친숙했다. 역사시간에 3.1운동과 함께 꼭 배웠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최근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로 인도여행 프로그램이 많아져서 인도에 관한 배경지식이 생겨난 탓인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었다. 하지만 비폭력이라니.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 아니던가. 비폭력대화관련 책들도 들여다보고는 바로 뒷걸음질쳐서 도망갔다. 내가 실천하지 못할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아서. 내가 투쟁적이거나 폭력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도저히 따르지 못할 것 같아서다.

살다보니 목적보다 수단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공감은 못할 때가 많다.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말이 항상 옳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다를것이다.  물론 한 인간이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한다고 할때, 간디는 정치인으로서, 한 남자로서, 비판받을 지점이 너무 많다.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에서는 말해주지 않았던 면모들 말이다. 저자도 그 부분을 가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간디의 비폭력이 사랑에서 나왔으며 평생을 다해 자기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장.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공자라니, 글자만 봐도 거부감이 든다. 대한민국에 여자로 태어나 살아오면서 싫어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유교나 공자는 5위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공자에 대해 읽으려니 시작부터 거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철학으로 접하는 공자의 사상에 배울 점을 찾고자 허리를 펴고 읽기 시작했다. ‘친절’ 다른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개념보다 훨씬 일상과 가깝고 이해가 쉬운 개념으로 공자를 설명해서 생각보다 읽기 수월했다. 게다가 친절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예의라는 개념을 설명하자 거부하고 싶었던 틀과 격식에 대해 조금 여유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친절이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살면서 경험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의 개념을 요즘 세대 언어로 바꾼다면 ‘다정함’ 정도가 될 것 같다. 다정함에 대해 말하는 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최근에 계속 내 마음속에서 맴도는 이유없는 다정함과도 닿는 부분이었다.


10장.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맙소사. 세이 쇼나곤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서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부터 해봤다. 앞부분의 철학자들과 같은 기차에 태우기에는 너무 저울이 기운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점때문에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무라사키 시키부와  겐지이야기까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마쿠라노소시와 세이 쇼나곤은 처음들어서 저자의 선구안에 대해 의견을 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국인의 정서가 공감을 방해한다.  작은 것에 감사했던 인물이 그녀만은 아닐테니까. 왜 그녀가 이 기차에 타고 있는걸까? 차라리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를 넣을 것이지.


11장.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이 책이 주는 재미의 상당부분은 저자의 자유로운 유머에서 나온다. ‘너무 똑똑하고 선견지명이 가득해서 무시할 수 없는 날라리’라고 니체를 표현하는 부분 같은. 서양철학의 나쁜남자라는 니체, 어떤 철학자일까? 읽어나가다보니 이 책이 아쉬운 이유를 알았다. 니체의 철학에 대해 알려주는 것보다 저자가 니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감상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서 쉽고 대중적인 철학서라는 장점은 얻었지만 동시에 이 책에 별점 하나를 준 사람들도 만들었다. 도대체 저자가 말하는 니체가 춤을 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 답답했다. 그래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고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은 내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인생에 고통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세상이 고통인지도 모른다. 내가 니체를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된다면 저 구절 때문일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지만.


12장.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에픽테토스는 스토아 사상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엔키리디온]을 쓴 로마의 철학자다. 이름조차도 처음 들은 그의 안내에 따라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일정 부분 스토아 학파로 살아왔던 것 같다. 그건 내가 크리스찬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으며 그 안에서 감사하며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 하지만 신체단련부분을 읽자마자 전혀 스토아 학파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다시 깨달았다. 반성.

가장 마음에 든 구절 -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가지 기준 -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


13장.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집중력이 확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 나의 늙음이고 마주하려 애쓰는 것도 내 노화이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노화도 서글프지만 지능, 정서적인 면이 낡아지는 것도 매우 서글프다. 그러니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 없을까 라는 저자의 질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티에이징과 요양원 사이에서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계속 읽었다.

보봐르의 사실성과 선택권을 읽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서의 성공에는 타고난 것이 훨씬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선택을 통해 우리의 주체를 만들어 간다고 해도 사실성을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노화의 과정을 급격히 느끼고 있는 나이라서 흥미롭게 읽었지만, 저자가 왜 하필 보봐르와 노화를 연결했을까 궁금하다. 보봐르와 여성을 연결하지 않은 것이 의식적인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봐르를 대표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기에 아쉽기도 했다.


14장. 몽테뉴처럼 죽는 법


노화를 거쳐 이제 죽음이 나온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저자 에릭 와이너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육아를 경험하지 않았나보다. 아이의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고 난 뒤에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이전과 다른 성찰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죽음은 그냥 없음이 아니고 탄생도 그냥 있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몽테뉴에게 죽음은 어떨까? 계속 읽어본다.

챕터의 제목은 몽테뉴처럼 죽는 법인데 몽테뉴의 삶에 대해, 그가 누구인지 보여주는데 더 많이 신경쓰고 있다. 몽테뉴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에 대한 동경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랬을 때 죽음도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된다고. 삶이 유한하기에 사람들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죽음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봐르의 소설 제목처럼 모든 인간은 죽으니까. 모든 사람이 몽테뉴처럼 심한 사고를 겪는다거나 해서 죽음을 경험하거나 연습할 수는 없겠지만 미리 준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사유할 시간이 부족하다는게 문제라서 그렇지.



총평과 별점.

★(그나마 반은 유머때문에 줌. 두 개 반 이상 못 주겠음.)

14명의 철학자에 대해 읽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는지 약간의 팁을 얻었다. 흘려버릴지 간직할지는 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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