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7남매 중 둘째셨다. 위로 맏형이 결혼 후 연달아 아들만 넷을 낳았다. 그리고 둘째인 우리 아버지의 첫 아이로 내가 태어나자 딸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첫 손녀라 제법 예쁨을 받았다. 명절에 할아버지댁에 내려가면 서로 나를 안고 있으려고 해서 바닥에 누워있을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딸 대접을 받았지만, 커가면서 딸이라 내내 아들 사촌들과 다른 대접을 받아야했다. 명절에 대 식구가 모인 밥상은 남자아이들 밥상과 여자아이들 밥상이 따로 차려졌다. 남자어른들과 남자아이들이 먹고 나면 그제야 딸들의 차례가 왔다. 그렇게 십여년을 살다 딱 한 번 할아버지 옆에 앉아 남자 어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대학에 합격한 해, 설이었다.
굳이 그 시절의 불평등함과 억울함을 토로할 생각은 없다. 82년생 김지영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리 없는 차등대우 속에 살았던 70년대 생이니까. 다들 그렇게 살았던, 그냥 그랬던 시절이니까. 그런 부모님을 이해하고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열 세살, 6학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가게에 가시고 휴일이었던지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어쩐 일인지 시골에서 할머니가 올라오셨는데 내 등을 쓰다듬으며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다. "엄마 없을때는 네가 아빠 밥 잘 챙겨드려야한다."
할머니 말씀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내게 자신의 밥상을 차리라고 종종 시켰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내가 어린 깜냥으로 어설프게 밥을 차리면 아버지는 꼭 한 마디씩을 덧붙이였다. 밥통에서 밥을 뜨면 주걱으로 뜰 때는 어떻게 떠야한다고 말하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밥상에 놓는 것도 예의와 격식을 차리라고 말했다. 그럴때마다 속에서 떠오른 말이 있었지만, 감히 뱉어내지 못하고 삼키기만했다. 할머니, 나는 어린아이인데, 왜 내가 아빠에게 차려줘야하나요?
나는 오늘 저녁 회식이 잡혀있고, 남편이 알아서 저녁을 차려 아이들을 먹일거다. 카레를 하거나 스파게티를 해서 먹을 수도 있고, 그도 귀찮으면 한솥도시락으로 때워도 괜찮다. 어찌되었건 아버지인 남편이 알아서 하지 아이들이 아빠에게 밥을 '차려드리지' 않는다.
혹시 아들이어서 그럴까? 만약 내 아이가 딸이었다면 나도 아이더러 아빠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했을까?
천만에.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의무보다 남녀의 역할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 스스로 차려 먹을 수 있지만, 우선적으로 부모가 제공해야하는 돌봄이다. 엄마건 아빠건 상관없다. 그게 부모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