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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Mar 30. 2024

이 신발 신고 좋은데 가세요

학교에서 신는 실내화가 망가졌다. 밑창이 너덜거려 할 수 없이 겨울에 신는 분홍빛 털복숭이 실내화를 신고 다녔다. 발에서 땀이 좀 나긴했어도 시려운 것보다 낫지 싶어 그냥 신었다. 하지만 점점 따뜻해지는 봄날, 이제 한겨울용 실내화는 보기 민망했다. 주말에 시장에  들른 김에 실내화를 살까 싶어 신발가게를 찾았다.


'공룡발'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는 이름처럼 매장이 크고 넓었다. 공룡발만한 신발을 파는건 아니고, 정말 온갖 종류의 신발이 가득했다. 알록달록한 아이들 신발, 누가봐도 일꾼들이 신을 작업용 고무장화, 각양각색 슬리퍼와 신사용 구두까지 없는 신발을 찾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브랜드따져가며 조심스레 신을 신발이 아니라, 교실과 복고에서 신을거라 무난하고 적당한 신발, 발이 편하고 푹신한 신발이면서 저렴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장님께 문의하니 대번에 이 신발을 꺼내주신다. "사무실에서 신을거면 가격도 그렇고 이거만한 게 없어요."

뒤축에 끈이 달린 간호사용 하얀 샌들보다 적당한 쿠션에 발볼도 딱 맞게 늘어나는 이 슬리퍼가 좋다며 신어보라신다. 신어보니 정말 발도 편하고 넓은 내 발볼도 딱 맞게 잡아줘서 움직이기 수월했다. 가격은 만오천원. 이 가격이라면 어디 찢어지거나 끊어져도 하나 더 사서 신어도 된다. 명품브랜드 짝퉁이 분명한 무늬가 좀 신경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사람들이 내 발등 쳐다보고 있을 것도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이 걸로 주세요."


계산을 마치고 비닐봉투에 담긴 실내화를 받아드는데, 사장님이 웃으며 말을 건내신다.

"이거 신고 좋은데 많이 가세요. 우리 가게 신발 신으면 좋은 일이 많이 생겨요."

사장님의 자부심이 가득한 말을 들으니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의 빨간구두가 떠올랐다.


뒷굽을 탁탁탁 세 번 부딪히고 원하는 곳을 말하면 데려다 주는 마법의 구두. 저렴한 시장표 실내화를 사는데, 마치 영화속의 빨간 구두를 신은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머, 너무 듣기 좋은 얘기에요. 감사해요, 사장님도 오늘 좋은 일 많이 생기셔요."

나도 모르게 수선스레 답례 인사를 하고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 역의 주디 갈란드가 신었던 루비구두. 출처 AP=연합뉴스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골목 안. 시끌벅적한 활기와 어수선한 생기가 넘치는 좁은 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무지개빛으로 가득한 마법의 세계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오즈도 아니고 나도 어린 소녀가 아니지만 말이다. 작고 사소한 다정함은 때로 작고 사소한 마법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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