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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Apr 13. 2024

나를 묶고 있는 밥에 대하여

 아버님이 혼자가 되신지 4년째다. 2020년 1월에 어머님이 소천하시고 쭉 혼자 지내고 계신다. 큰아들이 옆에 살면서 아들며느리가 먹을 것 부터 집안일까지 살뜰히 챙기고 작은 아들은 일요일마다 찾아가 구석구석 청소하고 점심을 함께 하며 말동무해드리고 돌아온다. 그런데 지난 주, 아버님이 슬쩍 이제 그만 시설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셨다. 내향적인 성품이셔서 교류하는 친구들도 없고, 사교생활이 거의 없다시피하시는 분이라 많이 적적하신데다가 먹을 것을 차려드시는 게 슬슬 지치시는 것 같다.


 "밥해먹는 것도 귀찮고 힘드신 거 같아. 시설에 들어가면 사람들하고 같이 밥 먹을 수 있고, 청소며 빨래도 다 해주고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으니까 좋지. 아직 건강하실 때 들어가시는게 낫겠지."

 남편은 더 일찍 들어가셨으면 좋았을거라고 했다. 두 아들이 아버님이 지내실만한 시설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묘했다.  



 올해 같이 근무하게 된 선배님은 사별하신 지 겨우 일년 반 남짓되셨다. 쾌활하고 활달한 성품이시고 골프나 그림 같은 취미활동도 적극적으로 즐기시는 분이다. 좀 힘들어하신다고는 알았는데, 지난 주 찾아오셔서는 느닷없이 퇴직을 하려 한다고 말을 꺼내셨다. 겉으로 보이는 밝은 모습과 달리 생활하기 힘든 부분이 많으셨던 것 같았다. 정년이 불과 4년 밖에 안 남았는데 모든 걸 포기하는 사람같은 표정으로 얘기를 꺼내셔서 놀라기도 했고, 혼자 지내시는 아버님 생각이 나서 도와드릴 부분이 있을까 싶어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별로 인한 심적 고통보다 매일같이 쌓이는 살림에 대한 부담감과 사회생활을 시작한 외동딸 사이의 갈등이 더 힘들어 보였다. 먹어야 살 수 있지만, 먹기 위한 과정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남자들은 아마도 몰랐겠지. 밥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수고와 시간, 정성이 필요한 일인지, 먹은 것을 치우는 노동이 얼마만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 아마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귀찮아서 굶거나 라면으로 떼우고,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그릇이 쌓이고. 눈에 훤히 보였다. 나도 부엌일이 귀찮고 하기 싫어하니까. 안할 수있으면 안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40년은 더 살아야 하지 않나. 지금껏 안하고 타인의 노동에 기대 살았으면 이제 혼자 자신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먹고 난 것을 치워야한다. 누구나 자신의 육신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였다.


먹는 것의 힘듦을 털어놓으신 다음에는 집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버겁다는 말도 하셨다. 주말에 겨울옷 치울 생각하면 갑갑하다고. 집에 할 일이 너무 많고 자신은 거기에 짓눌릴 것 같다고. 그러면서 딸이 아무것도 안해서 보기 싫다도 덧붙이셨다.


"장모님 생신이셔서 같이 가서 밥을 먹었는데, 아 이 딸년이 생전 집에서는 안하던 설겆이를 지가 하겠다고 하더라고. 집에서나 하지. 아 괘씸해."


"선생님! 얼마나 기특해요, 세상에 외할머니 힘드실까 자기가 치우고 왔으면 칭찬해주셔야죠. 잘 컸네. 너무 대견한 딸인데 뭘 그렇게 보기 싫다고 그러세요. 정말 예쁜 딸이구만. 그러지 말고 가사도우미 알아보세요. 청소나 부엌일 같은거 일주일에 한 두 번만 와주셔도 훨씬 수월해요. 주말에 부르시고 그 동안 잠깐 카페 다녀오셔요. 가까운 반찬가게도 알아보시고요."


사별의 고통과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계시다는 건 알겠지만, 딸이 자신을 챙겨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면서는 조금 화가 났다. 이제 23살, 갓 대학을 졸업한 딸이 엄마를 잃은 마음도,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갈 날이 얼마나 힘든지도 아빠는 알지 못한다. 지금 내 삶의 신산함과 무게만이 고통스러울 뿐. 아내를 잃은 남자만큼 엄마를 잃은 딸도 아프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딸도 돌아보지 못할 만큼 자신의 아픔에 짓눌려버린 아빠가 안쓰러웠다. '따님도 힘들어요, 조금만 더 감싸주세요' 마음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배우자를 잃은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 편해지실 수 있게 진심으로 들어드리고 조금 실없는 소리로 웃겨드리는게 다였다.

 

"선배님, 저랑 1년 보내고 그 다음에 생각해보세요. 아무나 저랑 같이 동학년 못한다니까요. 점심에 급식 많이 드시고, 가끔 주식 오르면 간식도 사주셔야죠. 난 선생님이 사주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더라. 급하게 결정하지 마시고요. 가사도우미랑 반찬가게 꼭 알아보시고요. 술은 안 드시니까 한 잔 하자고는 못하겠고, 저녁에 밥 한 번 같이 먹어요. 네?"



밥은 그런거다. 매일 밥에 끌려다니고 묶여있는 삶이지만 내가 차려내는 밥은 나의 다정함이고 내가 먹는 밥도 누군가의 다정함이다.


오늘은 늘어지게 늦잠 자고 일어나 아침겸 점심으로 밥을 차려 먹었다. 마트에서 양념된 불고기를 굽고, 냉동 떡갈비도 꺼냈다. 반찬가게 나물들과 구운 김도 내놓고 김치까지 올렸다. 그동안 남편은 어제 먹고 치우지 않았던 그릇을 씻고 음식물쓰레기를 치웠다. 같이 준비한 밥을 먹고 각자 방에서 각자 핸드폰으로 각자 놀며 오후를 보냈다. 게으르고 편안하게.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다는건 사실은 누군가의 다정함을 먹는 것> 이라고 쓰는데 "엄마, 오늘 저녁 뭐 먹을거야?"라고 큰 아들이 묻는다. 아, 세상에.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있다니. 다정함은 무슨, 밥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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