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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Aug 21. 2024

열대야 밤에 정전이라고?

폭염으로 열기가 식지않아 한밤중에도 에어컨을 끄기 힘든 8월의 한 가운데 어느날.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갑자기 집안의 모든 전기가 나갔다. 정전이었다. 에어컨을 너무 많이 틀어서 뭐가 잘못됐나 싶어 겁이 났다. 하필 남편은 담배 피우러 나가서 집에 없었다. 전기나 설비에 무지해서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작은 아들이 핸드폰으로 구글검색을 하더니 두꺼비집을 올려야한단다. 그래, 그런데 두꺼비집이 어딨지? 찾아볼 생각도 안하고 다른 집도 정전인가 싶어 창밖만 빼꼼 내다봤다. 맞은편 아파트도 불이 꺼져있었다. 우리집만 나간게 아니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다싶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다리면 켜지겠지, 마음 편하게 작은 아들과 둘이 붙어 앉아 상황을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나. 평소보다 조심스런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야심한 시각에 안내방송을 할 정도면 무언가 전체적인 공지사항이 있는게 분명했다. 귀기울여 들어보니, 한전의 문제로 예고없이 갑자기 전기가 나간 상황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였다. 열대야로 푹푹 찌는 밤에 선풍기가 돌지 않는게 아쉽지만 참을만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을테니 9층까지 걸어올 남편을 생각하면 조금 꼬시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아마 처음 겪는 정전일 거다. 아이는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곧핸드폰에 집중했고 그런 아이를 보며 나는 어린 날의 어느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전 내가 작은 아들보다 더 어렸을 무렵에는 정전이나 단수가 종종있었다. 여기저기 전봇대공사며 하수도 공사도 잦았다. 미리 예고가 있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끊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양초 서너개씩은 다 있었다. 전기가 나가면 얼른 성냥을 찾아 양초에 불을 붙여야했으니까. 어쩌다 불이 나가면 무서운 마음보다 어린 두 동생과 함께 불붙은 양초가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를 보며 신나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에 의지해 가족이 함께 모여있으면 그것도 즐거웠다. 불꺼진 방안과 촛불, 우리를 보듬는 엄마의 다정한 손길, 형광등이나 두꺼비집을 만지는 젊은 아빠의 듬직한 뒷모습. 내가 기억하는 정전에는 어딘가 따스함이 베어있었다.



 잠시 후 깜빡깜빡 하더니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시야가 밝아지고 선풍기와 냉장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흐물거리는 쭈쭈바 두 개를 들고 남편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작동할때까지 기다렸다 오는 바람에 아이스크림이 녹았다며 내밀었다.

"아니, 아빠, 그냥 걸어왔어야지, 이게 뭐야!" 아들은 냉장고를 열며 아빠를 타박했고 나 역시 운동겸 걸어오지 그랬냐고 말을 더하려는데 남편이 먼저 남편이 말했다.

"아이하고 엄마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었어. 무서웠겠더라."


그런 긴급상황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금방 복구되었다고 해도, 어린 아이가 그 안에서 얼마나 무섭고 떨렸을까. 그제야 지진이나 화재로 전기와 수도가 멈춘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 불편한 상황들에 생각이 미쳤다. 몇 십 분 정전된걸로도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데, 며칠씩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까.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있는데, 아이스크림이 녹았다고 불평하려던 내가 부끄러웠다. 늦은 밤 출동해서 정비하시느라 애쓰신 얼굴도 모르는 여러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짧은 정전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지역 맘카페를 보니 어제의 정전 얘기가 여기저기 올라와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뿐만 아니라 다른 동, 다른 단지까지 꽤 여러 곳이 정전이었다. 내친김에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해보았다. 짧은 사회면 기사가 하나 나왔다. 2,600여 세대가 한 밤에 정전으로 불편을 겪었으나 곧 복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몇 줄에 지나지 않는 기사지만, 그 사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가벼이 읽는 기사들, 지나치는 뉴스들 뒤에 깊고 넓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검색해보니 기사나 났네요. 기사에 실린 사진 살짝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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