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Aug 09. 2024

20년 전 연인의 이름을 잊어버리다

고백하자면, 나는 오래 전, 정말 오래 전 연인들과 주고받은 메일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옛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종이였다면 짐정리하며 다 버렸을텐데, 메일이라서, 내 컴퓨터도 아니고 플랫폼 서버에 저장되어 있는 메일이라서, 그렇게 됐다. 지금은 쓰지도 않는 버린 메일계정이라서 생각도 못하고 그냥 살았다. 딱히 추억하거나 기억하려고한 의도는 아니었다. 편지는 잊혀졌고, 나는 남편 손을 잡고 같이 늙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어던 어느 날, 정리나 해둘까 싶어 오래 전 메일계정에 접속해보았고, 광고와 스팸이 쌓여있는 메일함 제일 처음부분에, 옛연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찾았다. 전체 선택해서 삭제할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클릭해서 몇 개 읽었다. 종이편지였다면 욕하고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편지도 있었고, 내 젊은 날의 흑역사가 보여서 파묻어버리고 싶은 편지도 있었다. 조금 그립고, 살짝 웃기고, 많이 민망했다. 메일 답장인 경우에는 내가 보낸 편지도 같이 확인할 수 있어서 더 그랬다. 그러면서 그때 얼마나 절실했던가도 떠오르고, 헤어졌을때의 (주로 내가 차였다.) 아픔도 아릿하게 기억났다. 문득 예전 내 모습을, 그 시절 내 감성을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보관함을 만들어-차마 이름붙이기 민망해 숫자로만 붙여서-메일들을 저장해두었다. 그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난다.



다락방에 먼지 쌓인 짐을 발견하고 치워둔 것 처럼, 그렇게 저장한 후 당연히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계기로 뜬금없이 그 옛날 연인이 떠올랐다.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궁금한 마음이 들었는데, 동시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만화였다면 내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을것 같다.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 나지 않았다. 누구였지? 뭐였지? 갑자기 잃어버린 이름을 떠올리고 싶어져서 한참을 고민했다. 메일을 정리할 때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을 이름인데, 내 안에서 풍화되어 사라진 걸 확인하니 마음이 애매하게 흔들렸다. 함께 나눈 대화도, 얼굴과  잡은 손의 촉감도 기억할 수있는데 어떻게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않는지. 솔직하게, 서글펐다. 애절했던 그 시절의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너의 이름'은 결국 '나의 시절'이었으니까.


내 안에서 이름을 기억해내고 싶은 마음과 뭐하러 찾아보냐는 마음이 들쑥날쑥했다. '애틋하고 소중했던 이름이니 기억은 하자'는 마음과 '아이고 의미없다'는 마음. 작은 갈등 끝에 '찾아서 뭐하냐는 마음'이 나를 설득했다.  


이름을 잊었다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지냈던 젊은 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시절을 지나 쌓아온 지금의 내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살짝, 아주 살짝은 안타깝고 조금은 홀가분하다. 지나간 시간에 얽메이는 것보다 흘려보내고 맑아지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이렇게 잊고 있으면 또 어느 날, 메일함마저 다 삭제하는 날도 올지 모른다.


입추가 지나서 그런가, 아침 공기가 어제보다 덜 뜨거운것 같다. 내 마음의 온도도 조금 내려갔다. 나는 늙어가고 이제 너무 오래 기억하고 있던 것들을 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20년 전 연인의 이름을 완전히 잊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