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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Oct 06. 2024

엄마는 힘숨찐

시작은 큰아들이었다. 어릴 때 얼마나 정성으로 이유식을 해먹였던지. 육개월 무렵부터 파인다이닝 쉐프만큼의 정성과 수고를 들여 엄마표 수제 이유식을 만들었다. 생협재료로 하나씩 손질해서 안전하게 먹을 수있는 식재료들을 확인하고 늘려가며 수랏상 차리듯 이유식을 해먹였다. 돌 지나고 두 돌 지나고  어른들과 같이 먹을수 있게 되어도 매운 것, 단 것, 탄산등 조절해가며 지켰었다. 국도 얼큰한 맛과 맑은 국물두 종류로 끓이고 나물도 두 종류로 무쳤다. 그때 적은 일기가 아직 남아있어 몇 개 옮겨본다.(아쉽게도 사진이 없어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2008.8.8

옥수수 찌고 알 떼네서 갈아 만든 옥수수 죽 이후, 닭고기에 도전. 

팔팔 끓여 육수내고 냉장고에 하루 저녁 넣어두고 면보에 걸러냈다.

살코기 잘게 찢어 다진 후 청경채를 넣어 완성.

닭고기 죽인데....... 

잘 안먹는다. 이상하다. 육수맛이 진하게 우려졌나? 간을 안해도 맛이 제법 나던데.

묽기 조절에 실패했나? 

한 번에 세 번 먹을거-하루 반 분량-를 만드는데

어젠 평소 반만 먹고, 오늘 오전엔 삼분의 2 정도, 오후에 역시나 반 정도만 먹었다.

먹는 것도 잘 안 받아 먹으려 해서 좀 애썼다.


2008.9.8

완두를 넣어 먹여서 이상없길래 두부에 도전 

두부닭고기완두죽 - 완두를 조금 넣어 살짝 연두빛을 돌게 해서 먹였다. 

두부버섯김죽 - 두부도 잘 먹고 괜찮아서 이어서 두부를 넣고 만들었다.

버섯과 김을 넣었더니 향이 좀 강하다. 버섯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버섯과 김 모두 새로 시도한 재료인데 잘 먹고 소화도 잘 하고 있다.

담엔 뭘 줄까. 

소고기브로콜리고구마죽 - 단백질을 너무 많이 주는 건 아닐까 조금 고민.


2008.11.21

찬물에 담가 간수를 뺀 두부를 팔팔 끓는 물에 데치고,

고구마 어슷 썰어 찜통에 찌고,

그릇에 담고 팍팍 으깨서 동그랗게 빚고,

기름두르지 않고 달군 후라이팬에 노릇노릇하게 지졌다. 

먹어보니 꽤 맛나더라. 그릇에 담아 앞에 놔줬더니 손으로 집어 잘도 먹는다.

아유 떠먹이는 거 보다 훨씬 편하잖아! 좋았으, 앞으로 자주 해주겠어,

하고 나도 밥을 몇 숟갈 떴는데.. 

다 집어 던지고 난리가 났다. 그릇 떨어트리고 손으로 집어 먹다 내 던지고..ㅠ.ㅠ

아빠같으면 방바닥에 떨어진건 버리겠지만...난 엄마, 게으르고 지저분한 엄마.

줏어서 다시 그릇에 담아 먹였다. 콰당당퉁당 집어던지는 준.....으깨진 고구마가 바닥에 사방팔방으로 튀어서 그거 치우느니 그냥 떠먹이겠다. ㅠ.ㅠ 아이쿠야....



이렇게 기록을 남겨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아들에게서 아들 대충 키운다는 소리를 매일 들을 뻔 했다. 어찌되었건 아이는 자랐고, 아무거나 마구 먹여도 양심에 찔리거나 걱정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라면을 먹으면 어떻고 삼각김밥을 먹으면 어떠냐, 햄버거도 떡볶이도 없어서 못 먹고 배불러 못 먹지. 이제는 아이 밥 차려주려고 시간맞춰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배달음식 좀 먹여도 괜찮고 여차하면 자기가 고추참치캔 따서 달걀후라이해서 알아서 비벼먹는다. 좀 짜게 먹는다고, 달게 먹는다고, 걱정하지 않는다. 사실 안 먹어도 걱정은 안된다. 아들 몸에 쌓인 영양분으로는 일주일 굶어도 걱정 안해도 된다.


그런데 십팔세 아들놈은 꼬옥 엄마한테 엄마의 정성이 담긴 수제요리를 해달라고 치댄다. 심지어 요리 사진이나 영상을 들고 보여주면서 이런 걸 자신에게도 해달라고 요구, 협박, 애원을 한다. 지난 번 다이어트때 조금 신경써서 챙겨줬더니, "거봐 엄마, 할 수 있잖아. 이렇게 해주란 말이야." 이 지랄을 했다. 그러면서 당근떡을 만들어 떡볶이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요리인고하니.

네이버에서 이미지 검색하면 나오는 화면

당근을 쪄서 으깨서 둥글게 빚어서 떡처럼 만든 후 떡볶이 양념에 볶은 요리다. 지금 이걸 나보고 해달라고? 어이 어삼 어사가 없으시다. 


아들, 엄마는 다섯단계가 넘어가는 음식은 안 만들어. 에그마요, 매쉬드포테이토, 이런 거 절대 안해. 꿈도 꾸지마. 

엄마 제발, 아들 다이어트를 위해 이 것도 못해? 찌기만 하면 으깨는 건 내가 할게.

그럼 그냥 네가 다 만들어. 엄마는 집에 부엌도 없으면 좋겠는 사람이야. 이런거 해달라고 요구하지 마.

엄마 너무해! 아들도 안 사랑하는 게으른 엄마!


그때 이후로도 아들은 계속해서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요리를 해달라고 징징거렸다. 냉동만두를 먹을 때면 엄마가 직접 만든 만두가 먹고 싶다며 엄마의 주먹 강도를 체험했고, 볶음밥을 해주면 이거 인스턴트야? 하고 물으면서 엄마의 인내심을 시험하더니 급기야는 고기를 볶아주면 또 배달음식이냐면서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했다. 


어제는 남편의 특제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먹고나서 쉬는데 작은 아들이 엄마를 비난했다. 하루종일 침대에서 책만 보고 게임하고 엄마가 제일 편하다고. 자기들이 빨래 개키고 화장실 청소하고 너무 억울하다면서. 점심에 엄마가 정성껏 육수 우려 끓여준 잔치국수를 먹은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게 틀림없다. 거기에 동조한 눈치없는 큰아들이 나를 껴안으면서 울부짖었다. 


"제발 엄마, 어릴때는 햄버거도 고기 반죽해서 직접 만들어줬다면서 왜 이제 안해주는거야. 그럴거면 나를 왜 낳았어."

대꾸할 가치도 없어 무시하고 있었더니 한 발 더 나간다.

"흑백요리사만 보지 말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하세요. 엄마 왜 힘숨찐이 된거야. 숨기지 말고 음식을 하라고요!"


힘숨찐. 힘숨찐이란 힘을 숨긴 찐따의 줄임말로서, 찌질한 주인공이 사실은 대단한 능력을 숨기고 있어서 위기의 상황에 힘을 발휘한다는 일종의 밈인데........아니, 나는 왜 이런걸 다 알고 있어서 아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건지. (추가, 강자에게 당하는 약자가 사실 나는 힘숨찐이다라며 정신승리하는 내용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네용)


"아들, 나는 그냥 으로 살거야. 절대로 안 드러낼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알았지?"

"엄마아!"

아들을 발로 차서 쫒아내고 다시 핸드폰을 집었다.  매일 슈퍼히어로로 사는 건 피곤하단다 아들아. 엄마는 그냥 힘숨찐으로 게으르고 편하게 살란다. 힘숨찐의 정체는 오늘도 지켜졌다.

  

이런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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