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다

전우치와 강동원과 죽음과 나

by 피어라

중3 올라가는 작은 아들에게 독서는 남의 일이다. 방학이라고 하루종일 게임만 하고 논다. 엄마의 협박과 애원에 간신히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초등고학년용 고전이야기, 전우치전이였다.


성의없이 펼치기는 했어도 133쪽짜리라 금방 읽기는 한 모양이길래 무슨 내용이냐고 슬쩍 물어봤다. 도술 부리는 부분이 나름 재밌었는지 몇몇 장면을 얘기한다. 전우치로 영화도 만들었다고 하니 흥미를 보인다. 강동원이 나오는 영화라고 소개해주는데, 맙소사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 아닌가! 아들아, 네가 수학을 못 풀고 영단어를 몰라도 강동원의 미모는 알아야한다. 사명감에 불타올라 당장 넷플릭스에서 찾아냈고 느닷없는 둘만의 영화관람이 시작됐다.


영화는 도사 전우치(강동원)와 그를 따르는 초랭이(유해진)가 요괴를 다스리는 피리를 차지하려는 화담(김윤석)과 맞서며 500년을 오가는 이야기다. 강동원의 화려한 미모와 액션, 탄탄한 조연들의 코믹 연기 덕에 아들과 꼭 붙어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 후반부, 화담이 초랭이를 위협하며 죽음이 두렵냐고 말한다. 목을 붙잡힌 초랭이가 켁켁대며 대꾸한다. “죽는게 무섭기보다 죽는 과정이 두려운거죠.”


죽음보다 과정이 두렵다. 영화가 아니라 책이었다면 당장 택을 붙이고 필사를 했을것 같다. 이전에 봤을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이고 기억도 안나는 대사인데 스쳐가는 저 한 마디가 마음에 들러붙었다. 중장년이 되어 죽음이 좀 더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영화 보는 내내 저 대사가 생각났다.


나도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두렵다. 알 수 없는 사후세계보다 죽기 전에 먼저 맞닥뜨릴 모든 것들이 다 무섭다. 손톱 끝의 거스러미도 아프고 불편한데, 죽음을 가져오는 고통이라니, 짐작조차 안된다. 육신의 고통만큼 쇠락한 정신도 두렵고 떨린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이 무섭고, 존재의 소멸만큼이나 내가 아닌 존재로 살아남는 것이 무섭다. 나 자신의 죽음도 그렇지만, 머지않아 다가올 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하는 자식으로서의 내 처지 또한 무섭다. 지켜보는 마음, 간병하는 마음,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 그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는건 얼마나 슬프고 애통할까. 죽음보다 먼저 겪어야 할 과정들을 생각하자니, 멀지 않은 듯 해서 서글퍼졌다.


죽음의 과정은 어디서 부터 어디 까지 일까.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부터 임종까지를 말하는 걸까,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동안일까. 아니면 노화가 시작된 순간이나 거동을 못하게 된 순간부터일까. 과정에 대한 의견차야 있겠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넓게 본다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결국 살아가는 것이 죽음보다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극복하기 위해 고행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삶에서 최대한 행복을 누리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방기해버린다. 이 두려움이 지나고,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는 차라리 자유롭지 않을까.


괴테가 죽기 전에 말했다지. ‘조금 더 빛을’ 이라고. 그저 창문을 열어달라는 말이었을까, 더 많은 진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을까.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죽는 순간까지는 괴테에게도 빛이 필요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인간은 욕망한다. 그 욕망의 과정에서 벗어나는 건, 결국 죽음 뿐이고, 그러하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으로 신의 뜻을 완성한 예수가 아닌 이상.


아들은 어느새 자기 방에서 만들던 프라모델에 집중하고 있고 나는 거실에 혼자 앉아 있다. 나는 어떻게 죽음의 과정을 감당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 캡처 2026-01-26 150110.png 아들은 강동원의 미모에도 감화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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