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
2010년 2월, 한 중년의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고뇌에 찬 표정으로 그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한 마디를 던졌다.
"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 획기적인 15초 광고는 대한민국을 크게 들었다 놨다.
B급 감성과 틈새를 파고든 멘트가 주효했다. 제품 매출은 즉각 150% 수직 상승했다.
〈10미터만 더 뛰어봐〉의 저자이기도 한 천호식품 김영식 회장의 작품이었다.
식품위생법상 제품 효능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어려움을 토로하던 김영식 회장의 사적인 푸념은 광고에 그대로 녹아들어 소위 대박이 났다.
그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부부생활에서 효능을 보고 만든 제품이라 그 우수성을 알리고 싶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이 광고 한 편으로 산수유는 곧 중년 남성 건강의 대표 격이 되었고, 산수유의 효능을 단박에 공감시킨 카피 한 줄로 대중은 산수유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게 됐다.
진심을 담은 카피 한 줄의 힘이었다.
재능은 있으나 그 재능을 증명하기 힘든 올라플은 김영식 회장의 산수유와 같다.
실제로 그들은 타고난 기획력, 뚝심 있는 추진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아이디어와 부지런한 성향까지 더하여 주어진 일들을 착착 해낸다. (물론 올라플마다 성향과 주특기가 다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기껏해야 어떠어떠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정도의 히스토리를 남기는 것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그마저도 프로젝트 안에서 무엇을 했냐는 질문을 받게 될 때면, 머뭇머뭇 뚜렷한 무언가를 말하기가 어렵다.
이것저것 안 한 일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렇게 말하자니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 듯 궁색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같은 어려움은 모든 올라플의 고민이자 고단함일 것이다.
열정을 다해 일을 하고 있지만, 어느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1인 다역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직무 중심의 동료들이 맡은 업무 외의 것들은 대게 올라플의 차지가 되는 이유에서다.
그동안은 이런 올라플의 역량을 지칭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
가장 유사한 것이 '제너럴리스트'인데, 제너럴리스트와 올라플은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제너럴리스트는 스페셜리스트와 대비되며 성향의 차이에 방점을 두고 사용되고 있다면, 올라운드 플레이어는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재능에 집중하고 있다.
굳이 스페셜리스트와 견주어지지 않고 그저 여러 가지 재능을 두루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을 올라운드 플레이어(줄여, 올라플)라고 부르는 것이다.
내가 한참 IT, 마케팅 프로젝트의 실무진으로 일하던 10~15년쯤 전의 일이다.
그때는 버티컬 한 업무 사이사이를 메꾸는 것을 주로 기획자들이 해냈다.
기획 (企劃)
명사 일을 꾀하여 계획함.
기획자들은 프로젝트의 x, y 좌표를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여기서 x, y좌표란 타임라인(프로젝트의 현재부터 미래 완료 시점 이후까지)과 역할(각각의 스페셜리스트들로 이루어진 팀) 사이를 말한다.)
기획자로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그에 필요한 산출물을 만들어 내는 본연의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했다.
한참 된 이야기라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 시절에는 클라이언트의 술친구까지 했어야 함은 물론이다. (모든 기획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사례)
올라플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우리의 삶에 가까운 이를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바로 우리의 엄마들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죠
손으로 만질 수 없죠
아무리 귀 기울여도 들을 수는 없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언제나 내 곁에 그 사랑이 있어
난 항상 행복한 거죠 엄마
- 〈엄마의 나무〉 중에서, 노래 7 공주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을 보면, 아빠와 두 아들들은 엄마에게 끊임없이 요구할 뿐 엄마를 들여다 보지 않는다.
결국 엄마는 "너희들은 다 돼지야!"라는 무시무시한 마법과 함께 사라진다.
엄마가 없는 집은 평범함을 잃는다.
그 속의 아빠와 두 아들 역시 점점 돼지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보건복지부가 육아정책연구소를 통해 발표한 '2018년도 보육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자녀양육 분담 비율이 엄마와 아빠가 7.21:2.79, 가사 분담 비율이 7.45:2.55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는 취업부모의 평일 근로소요시간 차이 2시간 16분(아빠 11시간 12분-엄마 8시간 54분)을 고려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양의 가정 일이 엄마에게 치우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육아와 살림은 도와주는 것이라 여기는 소극적인 배우자 앞에서, 많은 엄마들은 '등등' 또는 '그 외'로 일컬어지는 일들을 떠안고 있음을 통계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건 가정에서건 '기타 등등'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기억해야 하는 '고마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은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것'들은 단박에 '당연하지 못한 것'들로 변할 것이다.
이렇게 없어서는 살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코 사랑이다.
엄마의 사랑 역시 위대하다.
나도 엄마가 돼보니,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은 할 수 없겠다 싶다.
하지만 집 안에서 엄마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랑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엄마에게 사랑을 가장한 굴레를 덮어 씌우고 희생을 강요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와 현재를 거슬러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삶을 경외의 눈으로 들여다 보아야 하는 이유다.
1. 〈다 할 줄 아는데,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잡코리아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https://brunch.co.kr/@joan2hye/14
2.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나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이들의 상념)
https://brunch.co.kr/@joan2hye/15
3. 〈기회만 주신다면〉 (일잘러들도 어려운 직장 구하기)
https://brunch.co.kr/@joan2hye/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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