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부인과의 인터뷰>
“아~ 벌써 8시가 다 돼가네. 애들 빨리 씻기고 재워야지.”
창밖으로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바깥은 한여름. 아직도 환해서 낮인 줄 알고 (혹은 낮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계를 보자니 여지없는 저녁이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다 가버렸네. 숨 한번 크게 쉬고 첫째를 억지로 샤워실로 들여보낸다. 일곱 살이라 이제는 제법 혼자서도 씻지만 그래도 문밖에서 샤워하는 자기 모습을 봐달라는 아이. 열심히 샴푸를 하고 비누칠을 하는 첫째를 유리문 너머 응원하는 사이 둘째는 화장실에서 꼬물꼬물 기어 다니거나 자기 목욕통을 붙잡고 서서 물장구 놀이를 한다. 그러다 누나를 올려다보며 유리문으로 기어가 어떻게든 문을 밀어보려 애쓰는 아이를 “하늘아, 안 돼, 안 돼!” 하며 말리는 것도 매일 빠지지 않는 엄마의 멘트다. 누나의 목욕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잠자리에 들 준비. 혼자 두 아이를 재우는 건 몇 달 경력이 쌓였다곤 해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 특히 첫째와 둘째 육아휴직을 하면서, 나에게는 저녁 시간이 참 요원해졌다. 그나마 코로나 덕분에 저녁 행사가 줄어서 남편이 요즘엔 거의 매일 칼퇴를 해서 도와주고 있기에 한결 수월해지긴 했다. 첫째 때는 초보 엄마가 온전히 혼자서 아이를 재워야 하는 이 시간이 너무 고되고 힘들었다. 저녁 시간에 외출은 당연히 꿈도 못 꾼 지 오래. 백만 년 만에 친구가 준 공짜 티켓으로 남편과 공연을 보러 외출을 했을 때, 대학로에 생전 처음 가본 사람 마냥 두리번거렸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끝에 스치는 겨울밤의 차디찬 공기를 느끼며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지금도 둘째가 10개월이 넘었지만, 저녁 약속은 언감생심이다.
‘Witching Hour’
<타임푸어> 책을 읽다가 처음 알게 된 단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워킹맘들은 대부분 직장에 있는 시간인 한낮에 가장 행복하고, 오후 5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에 기분이 최악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시간을 영미권에서는 ‘마녀의 시간(witching hour)’이라고 부른다는 것. 아이들을 하원/하교시키고, 숙제를 시키고,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자잘한 청구서와 집안일을 처리하고, 짧은 시간에 아이와 긴밀한 교감을 하려고 애쓰는 시간. 이 시간은 정말 엄마가 마녀가 되는 시간일 터. 그럼 남자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아침 시간에 기분이 가장 처지고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 가장 행복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참나.
나에게 마녀의 시간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4시부터 잠자리에 드는 9시까지인 것 같다. 특히 악기 수업이 끝나고 난 5시 반부터 8시까지는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젖먹이 둘째를 안은 채 뺀질거리는 첫째를 어떻게든 책상에 앉히고 숙제를 펴기까지 티격태격, 옥신각신, 온갖 실랑이 한마당이 펼쳐진다. 겨우 시작했나 싶으면 모르는 걸 봐달라고 ‘엄마, 엄마’를 외치지만 둘째를 봐준다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동생만 본다고 삐지는 아이. 겨우겨우 달래서 숙제를 끝내면 둘째 이유식을 먹이고, 또 첫째 저녁 준비를 하고 먹이고, 그 사이에 둘째 응가 처리하기, 첫째가 어질러놓은 책들 정리하기, 첫째 책가방 챙기기, 거기에 틈틈이 설거지에 이런저런 집안일에… 휴~ 정말 빗자루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 듣고 싶은 강연이 있어도 저녁 시간이면 꾹 참고 넘겨 버리기 일쑤다. 커리어 여성들을 위한 플랫폼 ‘헤이조이스’에서 하는 강연들은 대부분 평일 저녁 7시 반에서 8시에 시작한다. 직장을 다닐 때는 친정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연을 듣고 10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 날도 간혹 있었다. 요즘엔 코로나로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어서 그나마 육아 휴직 중에도 집에서 들을 수가 있어 편하긴 하다. 문제는 그 전쟁 같은 저녁 시간 중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동안 아이들을 팽개치고 오롯이 강연에 집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냐 말이다. 그러니 매번 듣고 싶은 강연을 신청할까 말까 고민을 오래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꼭 듣고 싶은 강연은 결국 결제를 하고 마는데 식탁에 핸드폰을 세워두고 소리를 크게 틀어놓지만 계속 집중해서 듣는 건 무리다. 그냥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집안일하면서 오며 가며 듣거나 어쩔 땐 아이들을 재우면서 듣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은 안 자지만.
직장 생활할 때의 저녁은 퇴근 후 또 다른 직장으로 새롭게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온종일 떨어져 지낸 아이 얼굴을 부비부비 하고, 놀아주고, 책도 읽어주고, 씻기고 재우기까지 시간을 일분일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워킹맘의 저녁 시간. 아이를 재우고 난 뒤 기진맥진해서 같이 베개를 베고 누우면 3초 만에 레드썬이 되는 날들이 많았다. 회사에서 밀린 일을 하려고 짊어지고 온 노트북은 가방 옆에 얌전히 놓여 있고, 아침에 노트북 가방을 그대로 메고 나갈 때면 밀려오는 자괴감에 한숨을 푹 내쉬곤 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고등학교 동창들과 연말 저녁에 핫한 동네 상수동에서 송년회를 한 적이 있다. 한 명은 아이 둘이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한 명은 임신 중, 한 명은 딩크. 그러니까 나만 네 살짜리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겨놓고 시계를 보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내가 들어갈 때까지 아이는 할머니를 졸라서 계속 책을 읽어달라고 할 텐데. 빨리 들어가야 친정엄마가 집에 가서 쉬실 수 있을 텐데. 아 정말 난 언제쯤 마음 편히 친구들과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나도 한때는 퇴근 후, 친구들과 맛집에서 밥 먹고, 밤늦은 시간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즐거운 수다로 한껏 스트레스를 풀며 여유롭게 살던 사람이었는데.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L부인과의 인터뷰>의 인터뷰이 늑대 부인도 한때 잘 나가던 사냥꾼이었다. 먹잇감을 정하면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어 학생들에게 강의까지 했던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던 것. 하지만 이제는 토끼 같은 딸과 착한 신랑과 함께 살면서 매일매일 사방에서 터지는 집안일에 치여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다. 가끔 숲을 뛰어다니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신랑과 아이를 생각하면 숲으로 돌아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L부인.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주부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찾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나머지 활을 쏴서 거울을 깨뜨린다. 그리고 숲을 배회하는 한 마리 늑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영영 숲으로 돌아간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뒷장의 홍지혜 작가의 소개 글이 바로 그 힌트.
“종종거리며 청소를 하던 어느 날 늑대를 만났습니다.
늑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늑대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날 나에게 찾아와 준 늑대 부인에게,
그리고 밤마다 숲을 헤매는 부인을, 엄마를 기다려 준
신랑과 아이에게 이 책을 전합니다.”
밤마다 숲을 헤매는 부인.
최근 몇 달간의 내 모습이 딱 그런 늑대 부인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지난봄과 초여름, 지속가능하게 일하고 싶은 여성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창고살롱’에서 멤버로 활동을 했다. 이곳의 모든 강연과 모임은 엄마들의 육퇴 후 밤 10시. 아이들과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기상하는 엄마들에겐 좀 어려운 시간일 수도 있지만, (나도 올해 초에는 새벽형 인간으로 살았기에) 그래도 일하는 엄마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덜컥 결제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 밤 10시도 엄마들에겐 빠듯한 시간이다. 나 역시 간신히 아이를 재우고 나서 모니터 앞에 앉을 때가 많았는데 어떻게든 그 시간을 지키고 싶은 열망에 극적으로 육퇴를 하고 슬금슬금 모습을 보이는 엄마들이 매번 서른 명 가까이 모였다. 엄마이지만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하며 위로와 공감과 응원을 주고받는 훈훈한 감동의 시간. 우리들만의 이야기 숲에 빠져서 두 시간 동안 울고 웃고 난 뒤, 줌 회의에서 나가기 버튼을 누르고 현실로 돌아오면 마치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정수리에 흰머리가 송송 나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한 영락없는 40대 아줌마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활을 차고 숲을 활개치고 다니는 한 마리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있던 시간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어폰을 빼고 노트북을 덮으면 40대 육휴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다 깬 둘째를 안고 젖을 먹이는 K부인. 숲을 헤매며 에너지를 빵빵하게 충전시키고 결국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그런 숨통 트이는 숲이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곳, 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닌,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숲 말이다. 나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자존감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곳이자 긍정 에너지를 가득 충전시켜 집에 돌아와서도 마녀가 아닌, 요정 엄마가 될 수 있는 곳 말이다. 나 역시 지금은 육아에 몰입된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오면 나만의 숲을 뛰어다니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활 쏘기를 연마하려고 한다. 과녁은 거울 속 여기저기 얼룩지고 늘어진 수유 티 입은 노모. 그 한가운데 명중 목표! 우리 양궁팀 올림픽 경기 모습 돌려본다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