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은 머물 때가 있고 떠나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 시간을 잘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나라에 와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내 인생의 잠깐 동안 이나마 섬기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을 돌아보면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
평생 온몸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이나마 그들의 삶을 느껴보았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들 문화 안에서 모든 것을 절제하고 항상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얼굴도 가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어떤 삶이고, 어떤 감정인지 조금은 경험해 봤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은 나를 많이 성장하게 하였다.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많이 경험하고 그들과 삶을 나누기도 하였다.
심방을 돌다가 성도들의 가족들과 한 방에서 잠도 자보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짧은 언어로 열심히 어울려 지내기도 했다. 특히 아픈 분들에게 약을 나눠 주면서 그분들의 질병이 내게 옮겨와 같이 아프기도 했었다. 그래서 류머티즘, 신장염, 결핵성 늑막염, 피부병 그리고 두 번의 수술 등 파키스탄의 3년의 시간은 폭풍우의 연속이었다. 아픈 사람들과 같이 살다 보니 아픔도 기쁨도 병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았던 것 같다.
남편이 떠난 후,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힘들어하던 나를 돕기 위해 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파키스탄에 도착한 날은 내게 큰 행복과 감사의 순간이었다. 외할머니가 항상 곁에 계셔서 나는 아이 둘을 돌보며 작은 교회를 돕고 병원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상당히 서툰 내게 외할머니는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특히 아이들에게 어떻게 음식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때로 재정이 부족해 우유를 사지 못할 때도 할머니는
"걱정마래이 옛날에는 원래 이렇게 아그들을 길렀제, 그럴 수도 있제 하나님이 안 주시겠나 걱정 마라"
라고 하시며 밥물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버리는 뼈를 주워다가 푹 고아 아이들의 우유대신 먹일 뼈국물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마음이 원망과 슬픔으로 빠지는 것을 할머니는 잘 아셨던 것 같다.
그런 순간에 기가 막히게 할머니는 사이다 같이 시원한 말씀으로 큰 위로를 주시고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다.
할머니의 삶에 있었던 어려웠던 순간들을 내게 이야기해 주시면서 인생은 쉽지 않다고 그럴 때 눌러앉지 말고 일어서야 한다고 늘 격려해 주셨다.
"야야~ 그 우유 좀 안 먹는다고 아그들은 안 죽는다. 뭐 좀 없다고 몬살겠다 하고, 쪼매 힘들면 때려치우려고 하면 긴 인생 우얘 살라카노 괘안타 이래 먹이고 저래 먹이고 하다 보믄 아그들도 니도 모르게 다 커뿌는 기라 그게 인생이다.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해 살믄 된다."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살면서 양은냄비처럼 뜨거웠다 갑자기 냉해지는 내 믿음보다 할머니의 삶에서 묻어 나오는 인생을 바라보는 믿음이 더 담대하셨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근무하다가 오후에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4시 반쯤 그분들을 만나야 한다고 하여 일찍 마치고 병원문을 나섰다.
모처럼 일찍 집에 가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헐레벌떡 집에 달려가 보니 아파트 긴 복도에 할머니가 아들을 등에 업고 딸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어떻게 된일인지 몰랐지만 이미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 왜 여기 나와 계세요"
라고 칭얼거리는 아들을 안으며 물으니 할머니도 눈물을 흘리시면서 왜 집 밖에 나와 앉아있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말해 주셨다.
할머니는 아이들이 답답할까 봐 바람이 소통하기 쉽게 문을 열어두었는데, 아이들이 복도에서 놀고 싶어 나오고 할머니도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려고 나간 사이에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문이 닫혀 버렸단다.
우리 아파트 문은 밖에서 열쇠 없이 열리지 않는 문이었고 할머니는 열쇠를 들고 나오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두르고 있던 띠를 땅에 깔고 잠자고 싶어 하는 아들과 딸을 재우고 그냥 문 앞에 앉아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신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누구를 부를 수도 없고, 전화기가 없으니 전화를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오후 내내 할머니랑 두 아이가 차가운 바닥에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 아이가, 만약에 아그들 둘 중에 하나가 집 안에 있었으면 우짤 뻔했노! 아고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야 인자 됐다. 니가 왔으믄 됐다"
오후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힘들이 빠진 모습에 나는 너무 속이 상했다. 갑자기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왜 유난을 떨어서 이렇게 온 가족을 다 아프게 하는지, 도대체 난 왜 이런 삶을 계속 달려야 하는지... 너무 속이 상했다.
나는 급히 문을 열어주는 기술자에게 전화를 해서 문을 열어 아기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너무 지쳐서 누우신 할머님에게 먹을 것을 챙겨 드시게 하고 방에 들어가 아이들을 안고 펑펑 울었다.
옆방에서 할머니도 기도하시며 우시는 것 같았다.
내 깊은 곳에서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까지야… 혜경아 여기까지. 이제 더 애쓰지 마라 안 해도 된다. 이제 멈춰도 된다.'
신기하게도 내게 그런 갈등의 순간이 오면 할머니는 알고 있는 것처럼 딱 한마디로 나를 다시 세워주셨다.
"양은냄비처럼 살지 마래이 한번 하려고 맘먹었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기라,
그기 사명이고 헌신인기라"
할머님의 77세 생신날 모든 선교사님들을 모셔서 생신 잔치를 했다. 할머니 선교사님이시라고 같이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이 격려해 주셔서 늘 감사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접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고 내 평생에 이런 생일잔치는 처음입니더 이래 와주시고 부족한 늙은이를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더. 우리 손녀 부족한데 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더. 많이 드이소"
할머니도 멋들어지게 인사 말씀도 하시고 선교사님들과 재미있게 대화도 하시고 정말 처음이자 마지막의 화려하고 행복한 생신잔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탔다.
엄마가 유별나게 예수님을 믿어 고국을 떠나 멀고 먼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딸과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77세 연세에 손녀딸을 돕기 위해 먼 길 와주신 할머니를 위해 파키스탄의 멋진 마차를 태워 드리고 싶었다. 이런 멋진 마차를 타고 집에 가는 시간은 우리 네 명에게 파키스탄에서의 가장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드디어 파키스탄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 모든 열정도 젊음도 건강도 아낌없이 다 쏟아부었던 땅! 그리고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팠던 마음도, 슬펐던 마음도, 아쉬움도, 미움도 시원하게 이 땅에 다 두고 떠나고 싶었다.
아빠를 만나는 기쁨에 우리는 이쁜 옷도 하나씩 사 입고 짐도 다 정리하여 나눠 주고 최대한 작게 짐을 꾸렸다. 다른 것은 다 나눠 주었는데 두 아이가 사용하던 천으로 만든 기저귀를 이민 가방에 눌러 가득 채워 아빠가 있는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아! 온몸을 바쳐 치열하게 잘 살았다. 안녕 파키스탄!